베르그손, 혹은 몸과 마음의 이원론 문제

나는 근대 혹은 현대 문명의 바탕인 ‘몸과 마음의 이원론’, 혹은 ‘자연과 인간의 분리’를 데카르트가 주장했고, 그래서 데카르트는 오늘날 벌어지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악마화하는 모든 사조를 비웃는다. 어떤 사조인지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으나, 내 최근 발언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나는 이미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2017)에서 이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아래는 125쪽). 이 책은 제목에서 암시하듯 ‘인공지능’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는 몸과 마음의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철학적·생물학적 논의도 언급된다(책의 5장은 플라톤, 6장은 데카르트를 집중해서 다룸).

요컨대,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더 근원적인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왜 저렇게 생각했고, 그것이 별 이견 없이 수용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몸과 마음의 이원론이 잘못된 입론이라면, 그 대안이 무엇인지 제안되어야 마땅하다. 섣부르게 ‘그건 아니다’ 정도를 주장하는 건 무책임하다.

그런데 이미 서양에서도 베르그손(1859~1941)이 100년도 훨씬 전에 이 문제를 다루었고, 그저 다루었을 뿐 아니라 훌륭한 대안을 제시했다. 《물질과 기억: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시론》(1896)이 대표작이다. 들뢰즈의  《시네마》 연작은 이 책에서 베르그손이 제안한 아이디어의 재해석 혹은 정교화다. 이것이 《시네마》를 읽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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