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에게 가장 중요했던 문제는 ‘인식’의 정당화였다. 가령 《순수이성비판》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그러므로 시간상 우리의 어떠한 인식도 경험에 선행하는 것은 없고, 오직 경험과 더불어 모든 인식은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된다 해서, 바로 그렇기에 그것 모두가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 인식조차도 우리가 [감각]인상들을 통해[…] 수용한 것과 우리 자신의 인식 능력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출해 낸 것의 합성이겠으니 말이다.” (I. 칸트, 《순수이성비판》 재판 서론. KrV B 1. 나의 강조.)
그가 다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구절에서 분명한 것은 ‘경험’은 ‘인식’과 관련해서 중요하고, ‘인식’의 견지(“경험 인식”)에서 이해된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칸트가 이렇게 좁혀버린 ‘경험’의 의미에서 ‘경험’의 본래 의미를 되찾게 해주려 한다. 들뢰즈에게 흄이 중요했던 이유가 거기 있다. 그의 첫 단행본은 1953년에 출간한 《경험주의와 주체성. 흄의 인간 본성 시론》이며, 소르본대학 졸업논문이기도 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용어들은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지만, 훗날의 발전을 예고하고 있다. 즉, 칸트의 상대역으로서 흄을, 그리고 경험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
내가 앞에서 쓴 ‘칸트 앞 시대로 돌아가야 할 이유‘에서도 짧게 언급했고, 조만간 다른 글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칸트는 자기 앞 세대의 모든 철학자를 자기 자신의 문제틀로 가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마치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식’이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던 것이다. 그의 윤리학도 인식론의 틀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다. 나중에 들뢰즈가 《칸트의 비판철학》(1963) 및 이 책의 영어판 서문(관련 논문: 들뢰즈의 칸트 해석에서 시간이라는 문제)에서 개진한 내용은 사실상 ‘칸트의 탈을 쓴 들뢰즈’의 철학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앞의 인용문에서 칸트가 ‘우리 자신의 인식 능력’이라 부른 것은 ‘인간 모두에게 타고난 내장된 능력’을 가리키며, 요즘 용어로 말하면 ‘유전자에 새겨진 인식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윅스퀼은 칸트의 아이디어에 착안해, 생물 종마다 타고난 지각 능력이 달리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둘레세계(Umwelt)’ 이론이다. 윅스퀼은 생물학적·경험적 접근을 통해 둘레세계를 찾아냈다.
반면 칸트는 언어 분석, 더 정확히 말하면 명제 분석을 통해 인간의 인식 틀을 찾아내려 했다. 그것이 이른바 12개의 범주다. 물론 범주(지성의 몫)로 종합되기 전까지의 처리 절차(감성의 몫, 상상력의 몫)도 있다. 인간에게 내장된 능력의 (재)구성은 인식이, 더 정확히는 자연과학적 인식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에 대한 칸트의 답이다.
칸트는 인식을 자족적인 활동으로 여긴 것 같다. 세계 그 자체, 곧 물자체(Ding an sich)는 인식할 수 없다. 다만 인간의 선험적 인식 능력에 걸러진 세계인 현상만 인식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세계에 덧씌운 틀 혹은 그물에 의해서만 인식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왜 인식하는 걸까? 인식의 목적은 무엇일까? 혹은, 칸트에겐 경험이 인식으로 한정되어 있으므로, 경험은 왜 하는 걸까? 경험의 목적은 무엇일까? 당장 니체만 해도 이런 물음을 던지며 칸트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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