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재 한국의 학계(있는지 없는지 존재감도 없다는 점에서 이미 망한)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아무도 서로의 글을 읽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누차 지적해 왔다.
이 문제의 근원에는 한국연구재단(구, 학술진흥재단)이 주도하고 있는 ‘학술 등재지'(KCI) 제도가 있다. 등재지 제도는 학술 업적의 질적 평가에 대한 학계의 무능력과 상호 의심을 숨기고자 마련한 양적 평가의 잣대이다. 하지만 연구자 상호 심사(Peer Review)에 참여한 저자와 심사위원 3인 말고는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우스개소리(라고 하지만 거의 진실)가 있을 만큼 논문의 질적 성취에 대해서는 아무도 믿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왜냐하면 학술등재지 자체가 소수 학술단체의 돌려막기를 통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술지 발간에 임박하면 논문 투고를 받으려고 혈안이 된다. 투고 기한 연장은 일상다반사이다. 왜냐하면 투고된 논문 편수가 모자라서 다음 학술지 재심사 때 불이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학술지가 이런 사정이다. 인력 풀이 제한된 동종 업계에 너무 많은 학술지와 학술단체가 난립해 있다는 방증이다. (나는 인문계열에 국한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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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주장하려는 것은 저런 사정에 대한 총체적 비판이나 대안 모색이 아니다. 범위를 좀 좁혀 보려 한다. 나는 한국어로 발간되는 국내 학술지에 ‘번역’이 풍부하게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술지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럿이다. 글로벌 수준에서 중요한 주제를 놓고 논쟁하는 것도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어로 작성된 논문이라면 그런 목적을 갖는다고 하기 어렵다. 좁은 분야의 특수한 주제에 대해 한국어를 이해하는 외국인 연구자는 많지 않으니 말이다.
따라서 한국어 학술지에는 독창적 ‘주장’을 펼치는 것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논의되는 다양한 주제들을 ‘소개’하는 일이 중요하다. 솔직히 나는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좁은 연구자 풀에서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주장이 나오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난망하다. 학계가 풍요로워지고, 한국의 학계라는 것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 세계적 논의에 참여해야 하고, 그것도 다양한 주제를 망라해야 한다. 그래야 학계 내 좁은 칸막이를 치우고 다양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현재 인문계열 학계의 좁은 울타리란 일반인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이다. 바로 옆 연구실의 연구자가 하는 논의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기조차 어렵다. 전공분야는 그토록 좁다. 이를테면 한국의 연구자 대부분은 특수한 주제의 한국 지부 에이전트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게 이른바 ‘글로벌’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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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국 학자의 논문을 번역하자는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한국 학자가 외국 학자의 좋은 글을 충분히 인용해 가면서 자신의 논문을 쓰도록 허용하자는 것이다. 나는 아직 소개된 적 없는 외국 학자의 글을 길게 인용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글로부터 배우는 바가 더 많으며, 특히 내가 직접 읽을 수 없는 언어이거나 좀처럼 직접 접하기 힘든 주제인 경우 좋은 인용을 통해 해당 주제를 소개하는 것이 몹시 소중하다. 그래야 더 자극을 받을 수 있고, 넓어질 수 있다.
특히 학술 논문은 해당 분야의 전문 학자만 읽는 것이 아니다. 학생도 읽고, 주제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도 읽으며, 다른 분야의 학자도 읽는다(원래는 그렇다는 뜻이고, 한국에서는 이게 안 돼서 문제다). 이럴 경우 흥미로운 주제를 먼저 연구한 외국 학자의 글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요약하고 비교해 준다면 얼마나 유용한가 말이다. 현재 기준에서는 이렇게 논문 쓰면 표절이라고 욕 먹고 독창성이 없다고 욕 먹고 그런다(학술지 게재가 안 된다는 뜻임).
내가 갑갑함을 느끼는 건 거의 모든 연구자가 이렇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취직, 승진, 지원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침묵하는 현실이다. (나도 답답한 심정에 몇 년 동안 등재지 기고 자체를 거의 안 했고, 논문 편수 부족으로 원서조차 넣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얘길 하려던 건 아닌데… 암튼)
번역을 학술 업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한국 학계에 외치고 싶다. 니가 그렇게 잘났으면 왜 한국어로 논문 쓰며 한국에서 연구하니? 그 잘난 니 유학한 나라에서 논문 쓰고 연구하지 않고!
(2018.07. 최종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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