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니체, ‘거짓의 역량?’, 아니, ‘가짜의 역량'”이라는 글에 정대훈 교수가 다음과 같은 논평을 보탰다. 토론은 언제나 환영할 일이다.
“‘가짜’도 좋은 번역어지만 ‘거짓’도 원의에 충실한 면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가짜’든 ‘거짓’이든 존재론적이면서도 인식론적인 준거점인 ‘진짜’ 혹은 ‘참/진실’을 상정한 채 하위의 혹은 가치 없는 것을 나타내지만, 니체와 들뢰즈는 ‘가짜’ 혹은 ‘거짓’이 더이상 이러한 위계질서에 종속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짜’나 ‘진실’이 혼돈스런 어떤 것에 불과하다면 그와는 단절을 이루는 어떤 표면을 생산해내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산된 것은 ‘진실’을 충실히 반영하지 않는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거짓’의 생산은 가치 있는 일이 됩니다. ‘거짓(말)’의 생산은 존재를 꾸며내어 ‘가짜’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요는 두 번역어 모두 허용되는 번역어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어느 쪽이건 번역과 함께 주해가 필요하겠죠.^^”
짧더라도 여기에 답하는 게 필요해 보였다. 정교수는 ‘가짜’든 ‘거짓’이든 별 상관 없다고 했으나, 동의하기 어렵다. 인식론은 존재론에 후행하니, ‘진짜 vs 가짜'(존재론 차원)와 ‘참(진실, 진리) vs. 거짓'(인식론 차원)은 구별해야 한다. 가령 거짓말(Lüge, Lie, mensonge)은 인식론 차원에서는 ‘거짓’이지만(왜냐하면 참말이 있기 때문. 밖에 비가 오지 않는데, “밖에 비가 오네”라고 하면 거짓말임), 존재론 차원에서는 ‘가짜’이면서도 ‘진짜’일 수 있다(듣는 사람에게 화행적pragmatic 효과 혹은 발화효과perlocutionary를 낳음). 가짜를 진짜로 바꾸는 힘이 니체가 말하는 조형plastic력이다.
니체의 악명 높은 개념 ‘권력의지'(der Wille zur Macht)의 핵심이 조형력이다. 가령 다음 구절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 파편이고 수수께끼고 무서운 우연인 것을 하나로 압축하고 결집하는 것, 그게 내 모든 창작이고 노력이다. / 그리고 만일 인간이 창작자이자 수수께끼를 푸는 자, 우연의 구원자가 아니라면, 내가 인간임을 어찌 감당하겠는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구원에 대해”) 삶과 세상이 우연이고 파편일지라도, 그걸 압축하고 결집해서 ‘내가 욕망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니체가 생각하는 ‘구원’의 의미다. 따라서 존재론 차원의 이해는 인식론 차원보다 훨씬 깊은 수준에서 이해되고 강조되어야 한다.
정교수는 준거점(진짜/참/진실)이 사라졌다는 데 주목해서 ‘거짓’과 ‘가짜’ 모두 허용되는 번역이라고 했는데, 권력의지 혹은 조형력의 관점에 서게 되면 ‘가짜’야말로 ‘진짜’임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를 ‘거짓’이라고 여전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니체나 들뢰즈나, 인식론은 별 관심사가 아니다.
다음 구절도 참고(PP 93):
“Mais justement, quand il y a faux, le vrai à son tour n’est plus décidable. Le faux n’est pas une erreur ou une confusion, mais une puissance qui rend le vrai indécid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