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고향 : 니체, 들뢰즈, 프로이트, 하이데거

‘집’을 가리키는 독일어는 Heim[하임]이며 이 말은 ‘고향’을 가리키는 Heimat[하이마트]와 유래가 같다. 뒤척이던 중 ‘집’ 또는 ‘고향’과 관련해 대비되는 두 부류의 철학자가 떠올랐으니, 니체와 들뢰즈가 한 쪽에 있고 프로이트와 하이데거가 다른 쪽에 있다.

 

  1. 니체

니체의 저 유명한 “차라투스트라 서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Als Zarathustra dreißig Jahre alt war, verließ er seine Heimat und den See seiner Heimat und ging in das Gebirge.” [차라투스트라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버리고 산속으로 갔다.] 니체의 사상은 ‘고향을 떠남’ 또는 ‘여행’에 있다. 차라투스트라 4부의 마지막인 “기호”는 차라투스트라의 하산, 즉 ‘(제2의 고향인) 동굴을 떠남’으로 끝난다.

 

  2. 들뢰즈

들뢰즈 사상에서 아직 충분히 해명되고 있지 않은 개념의 하나가 “영토(territoire)”인데, 그는 이 말을 “chez soi” (영어: at home), 즉 “자기 집에 있음”이라고 설명한다. 새가 나뭇가지에 앉더라도 자리를 가리는 까닭은 영토를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인간적이고 정주적인 의미가 강한 ‘집’ 대신에 동물적이고 유목적인 의미가 강한 ‘영토’로 말을 바꾼 것이다. 동물의 영토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잠정적인 것이어서 언제든지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동물 세계는 포식자와 위험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영토의 해체’ 또는 ‘영토에서 떠나감’은 영토의 구성과 동시에 설정되는 ‘탈영토화의 선(ligne de déterritorialisation)’ 또는 ‘도주선(ligne de fuite)’이다. 들뢰즈는 프랑스어에 여기에 적합한 말이 없어서 이 기괴한 말(“탈영토화”)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하며, 영어에 ‘outlandish’라는 말이 있음을 부러워한다. 들뢰즈의 사상에서 영토를 떠남은 근원적이다. 들뢰즈는 영토를 구성하고, 꾸미고, 떠나는 운동을 ‘리토르넬로’라고 부른다. 들뢰즈에게 리토르넬로는 예술 그 자체이다.

 

  3.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Das Unheimliche (영어: The Uncanny)라는 독특한 개념을 소개한다(1919년). 형용사 unheimlich[운하임리히]는 heimlich[하임리히]의 반대말로, 여기에 정관사를 붙여 명사형으로 만든 거다. 그런데 heimlich는 통상 ‘친숙한, 은밀한’ 등을 가리키는 형용사로, ‘집’을 뜻하는 Heim에서 유래했다. 가정적인 집에 있을 때 갖게 되는 여러 느낌들을 담고 있는 말이 heimlich였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논문에서 uncanny를 이렇게 정의한다. “the class of frightening things that leads us back to what is known and familiar” [알려지고 친숙한 것으로 우리를 돌아가게 해 주는 놀라운 것들의 부류 // 편의상 영어에서 옮김]. 그런데 프로이트는 heimlich의 상반된 두 뜻에 착안하는데, 앞서 제시한 ‘친숙한’과 ‘은밀한’의 대비가 그것이다. 따라서 unheimlich의 뜻도 둘로 나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를 도식화하면 이렇게 된다.

heimlich I = known, familiar; unheimlich I = unknown, unfamiliar [h 친숙한 ; uh 낯선]

heimlich II = secret, unknown; unheimlich II = revealed, uncovered [h 은밀한 ; uh 드러난]

따라서 heimlich와 unheimlich는 그 의미론에 있어 완전한 순환 속에 놓이게 된다. 프로이트의 테제는 이렇다. “unheimlich, the uncanny = revelation of what is private and concealed, of what is hidden; hidden not only from others, but also from the self.” [uh = 사적이고 감춰진 것, 숨겨진 것의 드러남. 타인에게 숨겨졌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숨겨진 것의 드러남.]

* 참고문헌은 여기

 

  4. 하이데거

하이데거가 진단하는 현대 세계는 ‘고향상실(Heimatlosigkeit)로 진단된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박찬국 교수의 저서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2004)에 대한 기사로 대체하겠다.

“하이데거 철학은 까다롭기로 악명 높지만, 그는 그 난해한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어를 독일인들이 쓰는 일상어에서 빌려 왔다. ‘고향’, ‘대지’ ‘들길’ 따위의 시적 언어가 그대로 철학 용어가 된 것이다. 그의 철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어인 ‘존재’는 우선은 인간의 현존을 가리킨다. 그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말해 삶의 의미를 우려와 걱정과 관심과 돌봄의 눈길로 문제 삼는 존재자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 전체를 문제 삼는 것을 두고 하이데거는 ‘실존’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에게 존재란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하고 소박한 자연’을 지칭한다. 한 마디로 줄이면 ‘고향’이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현대 세계는 기술 문명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잃어버리고 존재 의미를 상실해버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의 도구가 되어 버린 불안과 공허와 권태의 세계다. 하이데거는 그 고향의 들길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현대 기술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계기도 보이지 않는 이 때에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하나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고명섭 기자)

*기사 원문 전체 보기

 

  5. 맺으면서

쓰다 보니 잘 모르는 건 길어졌다.

프로이트는 호프만의 소설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데, 나는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그의 테제가 호프만의 소설을 잘 분석한다 한들, 크게 관심이 가지도 않는다. 내 관심은 프로이트가 집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또 어떤 전제를 깔고 있는지, 이런 점이다. 살다가 친숙하고 익숙했던 것이 크게 낯설어지고 황망하지는 경험을 누구나 하게 된다. 하지만 그건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한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그 낯섦과 황망함은 이미 내밀하고 친밀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순환 상황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더 진도가 나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더 중요한 건 밖에서 오는 낯설음, 폭력, 힘, 충격, 이런 것들이고, 이런 것들이 더 빈번하게 삶에 영향을 주지 않나?

하이데거는 명칭을 뭐라 부르건 간에 ‘본질’ 또는 ‘근원’을 설정하고 그것을 ‘고향’으로 비유하면서 그것의 상실에 비애한다. 시간은 자식을 잡아먹는 법이며,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다. 현대 기술의 폐해에 이를 갈고 저주를 퍼부을 수는 있겠지만, 원한감정과 복수심을 품을 수는 있겠지만, 그런 식의 실천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 수 있을까?

 

집과 고향에 대한 생각은 다른 각도에서도 정리해 보고 싶다. 이는 정주와 유목의 관계와도 같으리라. 움직여야 움직이는 거고 멈춰야 멈추는 거라면 너무 도식적이다. 운동성이란 무엇이며, 그 속에서 정지란 무엇일까?

 

(최근 수정 20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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