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료의 힘을 강조한 학자는 시몽동이며, 들뢰즈는 이를 잘 계승했다. 요즘 신유물론을 자칭하는 학자들이 새삼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내가 보기엔 과장이 섞여 있다.
시몽동은 전래의 질료형상설(hyleomorphism)을 비판하며, 질료가 형상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시몽동에 따르면 질료형상설은 거푸집(module, 주형)에 진흙이 넣어져 벽돌이 만들어진다는 식의 착상을 가리킨다. 하지만 진흙이 거푸집이 규정하는 대로 순응하는 건 아니다. 거푸집으로 찍어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협조하지 않으면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진흙과 거푸집은 서로 힘을 주고받는 관계, 즉 변조(modulation) 과정 속에 있다.
어찌 보면 질료형상설의 원조라 할 수 있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후대에 해석된 식으로 질료형상설을 주장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우선 플라톤에 등장하는 코라(chora)가 그렇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도 질료를 그저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ousia)는 개체며, 개체는 형상(eidos)과 질료(hyle)의 결합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질료를 개체 빼기 형상, 즉 개체에서 지칭되지 못하거나 이름 불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았을 뿐, 질료를 수동적인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자면, 나무로 된 책상이 있는데, 책상으로 불리지 못하는 측면인 나무가 질료다. 하지만 나무는 다시 섬유질과 수분과 그밖의 여러 성분으로 되어 있고, 나무로 불리지 못하는 그런 측면들이 이번엔 질료다. 요컨대 질료는 상대적이다.
질료를 가리키는 희랍어 휠레(hyle)가 나무를 뜻한다는 점은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개체가 먼저 있고, 형상이 지칭되며, 남는 것이 질료다. 《안티 오디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가 질료를 흐름으로 대체하고 형상을 절단, 즉 코드로 대체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전통을 적극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질료의 상대성이라는 점을 주목하면, 들뢰즈와 과타리의 기계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오마주일 수 있다.
다시 신유물론자로 돌아가면, 이들은 비인간의 행위자성(?)을 주장한다. 아무리 행위자성이라는 말을 한다 해도, 인간과 같은 수준과 방식의 행위는 아니다. 인간의 능력을 약화하려는 의도는 이해가 가지만, 그것은 들뢰즈와 과타리의 배치체(agencement, assemblage) 개념 정도로도 너끈하다. 배치체는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을 통해 생성하며, 그 안에서 인간은 충분히 느슨해진다. 사정이 이런데도 신유물론자는 중요한 철학사적 자산은 참조하지 않는 듯하다(혹은 외면하거나 몰이해한다).
물론 들뢰즈가 표현한 바 있듯이 이것은 지하의 전통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사 작업과 철학을 통해 이점을 누누히 강조한 바 있고, 사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져 있기도 하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들뢰즈의 작업에서 더 풍부한 관점이 도출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유물론자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하는 양 포장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어서다. 도대체 무엇이 새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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