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모토 준이치로가 지은 『들뢰즈와 맑스: 이웃의 코뮤니즘』(이성혁 역, 갈무리, 2025)은 들뢰즈와 과타리의 ‘자본주의와 분열증’ 연작(『안티 오이디푸스』(1972) 및 『천 개의 고원』(1980))에 대한 매우 도발적인 해석을 개진한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의 내용을 잘 요약한 문장들이 번역본 뒷표지에 있다. 조사해 보니, 일본어 원서 뒷표지에 실린 글이다. 또한 저자의 ‘후기’에도 거의 비슷한 진술이 있다(389-390쪽). 내가 조금 손 본 번역문 뒤에 원문을 싣겠다.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은 맑스와 맑스주의로 완벽하게 관통된 작품이다. 지금 나는 스스로를 완전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질 들뢰즈)”
만약 ‘자본과 노동이 만났다면’이라는 조건법의 발사장치 없이 산업 자본주의는 현실에서 성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양자의 결합은 필연이 아니고, 인과관계도 아니다. 그렇다면 ‘자본과 노동이 만나지 않았다면’이라는 발사장치를 통해 우리는 다른 궤적을 구상할 수 있고, 그 구상을 실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가 우리의 뇌에 투영하는 사유재산제 유토피아와는 다른 세계, 봉건제의 구속으로부터의 도주가 자본주의에 의한 노동력 상품의 포획과 직결되지 않고 비틀리며 멀어져가는 세계를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를 역사화하고 이야기를 끝내는 것. 들뢰즈 철학과 ‘역사가’ 마르크스의 만남에서 엿보이는 코뮤니즘이라는 이웃 지대.
(『アンチャオイディブス』と 『千のプラト ー』はマルクスに、 マルクス主義に完璧に 貫かれた作品です。 现在、 私は自分のこと を完全にマルクス主義者だと考えています」 (ジル•ドゥルーズ)
「くも資資本資労働が出会ったのであれば) という条件法のカタパルトなくして産業資資 本主義は現実に成立しなかった。 両者の結 合は必然ではないし、 因果関係にもない。 だとすれば くし資本と労働が出会わなか ったのであれば) をカタパルトとして描き だされる軌道を (私たち) には構想するこ とができるし、 その構想を実現することも できるのではないか。 資本主義が私たちの 脳に投影する私有制ユートピアとは異なる 世界、 封建制による拘束からの逃走が資本 主義による労働力商品の捕獲と順接せず、 ねじれて遠ざかりつづけていく世界を描出 できるのではないか」
資本主義を歴史化し、 物語を終わらせる こと。ドゥルーズ哲学と 「歷史家」ママクス との遭遇から垣間見るコミュニズムという 近傍ゾーン。)
이 문장들은 저자의 논지를 잘 요약하고 있다(현재로서는 1장과 후기만 읽은 상태). 저자는 자본과 노동의 만남이 필연도 인과관계도 아닌 우연(우발)이었고, 그런 만남이 이루어진 건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소급해서[회고적으로] 세계사를 썼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런 만남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다른 가능세계(조건법)를 상상하고 다시 역사를 쓴다면, 코뮤니즘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제안한다. 저자는 이런 해석의 단서를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끌어온다.
저자는 책의 맨 앞 도입부(1부 1장)에 『안티 오이디푸스』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해당 구절은 『안티 오이디푸스』 4부의 거의 끝에 나온다. 저자가 인용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혁명적 잠재력이 어떻게 현동화(現動化)되는지를 해명하는 것은, 전의식 상태에서 작용하는 원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정확하고 적확한 순간에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욕동(欲動)에 의한 절단’이다. 이 절단은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고, 인과관계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 단절은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다시 쓰기를 강제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이하게 다의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AO 453-454) (번역 16쪽)
(革命的潜勢力がいかに現動化するのかを解明するのは、前意識状態において作用する原因であるよ りは、むしろある正しく的確な瞬間において現実的に起こる欲動による切断〉である。この切断 は欲望を唯一の原因とする分裂であり、因果関係からの断絶を意味する。この断絶は実在するものに密着した歴史の書きなおしを強制し、いっさいが可能となる奇妙にも多義的な瞬間を生みだす。) (원서 8쪽)
그런데 이 구절은 들뢰즈의 지도 제자 우노 구니이치(宇野邦一)의 2006년 번역과 사뭇 다르다. 이치쿠라 히로스케(市倉宏祐)가 1986년에 번역한 책을 참조한 것인지, 아니면 저자가 직접 번역한 것인지 확인하지 못했다(구글 검색에 안 잡히는 걸 보니 직접 번역한 게 아닐까 싶은데…). 이제 해당 구절을 우노의 번역과 비교해 보겠다.
“혁명적 잠재성이 어떻게 현동화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잠재성을 포함한 전의식적 인과성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특정 순간에 발생하는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이다. 이는 곧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며, 달리 말해 인과관계의 단절이다. 이러한 단절은 현실적인 것에 밀착하여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제하면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이 기묘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탄생시킨다.”
(革命的な潜在性がどのように現働化するかを 説明するものは、潜在性を含む前意識的な因果性状態ではなく、むしろある特定の瞬間 におけるリビドー的切断の実効性なのだ。これはすなわち欲望を唯一の原因とする分裂 であり、つまり因果関係の断絶であり、この断絶は、現実的なものに密着して歴史を書 き直すことを強制し、あらゆることが可能となるこの異様に多義的な瞬間を生みだす)。(하권 301쪽)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끝으로 내 번역(민음사, 2014)을 프랑스어 원문, 영어본과 나란히 제시하겠다.
“혁명적 잠재력의 현행화는 이 잠재력이 물론 포함되어 있는 전의식적 인과성 상태보다는 어떤 정확한 순간에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에 의해, 즉 욕망을 그 유일한 원인으로 지니고 있는 분열의 실효성에 의해, 말하자면 심지어 현실계에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한, 이상하게 다의적인 이 순간을 생산하는 인과성의 단절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621쪽)
L’actualisation d’une potentialité révolutionnaire s’explique moins par l’état de causalité préconscient dans lequel elle est pour tant comprise, que par l’effectivité d’une coupure libidinale à un moment précis, schize dont la seule cause est le désir, c’est-à-dire la rupture de causalité qui force à réécrire l’histoire à même le réel et produit ce moment étrangement polyvoque où tout est possible. (프랑스어 본 453-454쪽)
The actualization of a revolutionary potentiality is explained less by the preconscious state of causality in which it is nonetheless included, than by the efficacy of a libidinal break at a precise moment, a schiz whose sole cause is desire — which is to say the rupture with causality that forces a rewriting of history on a level with the real, and produces this strangely polyvocal moment when everything is possible. (영어본 378쪽)
내 생각에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force à réécrire l’histoire à même le réel”이다. 저자는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다시 쓰기를 강제하고”라고 옮겼고, 우노는 “현실적인 것에 밀착하여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제하면서”라고 옮겼으며, 영어본은 “forces a rewriting of history on a level with the real”로 옮겼다. 나는 “심지어 현실계에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요하고”라고 봤다. (참고로 번역자 이성혁은 내 번역에서 “즉 욕망을 그 유일한 원인으로 지니고 있는 분열의 실효성에 의해” 부분을 빼버려서 문맥의 의미를 망쳐버렸다. 17쪽)
해당 대목이 왜 중요한가? 저자처럼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을 역사 서술, 기술의 차원에서 이해하거나 ‘허구’나 ‘우화(fabulation)’를 만드는 것, 혹은 ‘가설’로서 ‘허구’를 세우는 일로 해석하는 것(30-31쪽)이 타당한가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논평문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언컨대, 들뢰즈와 과타리의 입장은 ‘심지어 현실(계)에 역사를 다시 쓴다’는 데 있다. 그것은 가설과 허구를 지어내는 일과 전혀 상관없다. 오히려 현실을 새롭게 빚어낸다는 뜻이다.
해당 구절이 등장하는 더 큰 문맥을 통해 의미에 접근해 보자. 이 구절은 『안티 오이디푸스』 4장 ‘분열-분석 입문’의 5절 ‘분열-분석의 둘째 정립적 임무’ 중 마지막 대목 ‘혁명적 운동들과 관련한 분열-분석의 임무'(446-458/613-628: 이런 식으로 표현한 숫자의 앞은 프랑스어 본, 뒤는 한글본)에 나온다. 위치상 책 전체를 마무리하면서 결론을 환기하는 지점이다.
책 전체에 걸쳐 들뢰즈와 과타리는 세 층위의 투자를 구별한다. 1) 이해관계의 전의식적 투자, 2-1) 무의식적 리비도의 반동적, 편집증적 투자, 2-1) 무의식적 리비도의 혁명적, 분열증적 투자. 투자란 어딘가에 무의식과 욕망의 에너지인 리비도(libido)를 부여하는 일을 가리티며, 파생적 혹은 이차적으로 의식적 혹은 (의식되기 전 단계의) 전의식적 이해관계의 투자로 표출되기도 한다. 1)과 2)를 가르는 것은 투자가 (전)의식적이냐 무의식적이냐 여부다. 사람들이 이해관계를 거스르고 배반하는 까닭은 이해관계란 욕망과 무의식에 대해 파생적이고 일차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해관계 아래를 흐르는 욕망과 무의식을 분석해야 한다. 2-1)과 2-2)를 가르는 것은 무의식적 투자의 성격이 반동적, 편집증적이냐 아니면 혁명적, 분열증적이냐 여부다. 이제 관건은 서로 상반되는 이 두 성격 혹은 경향성을 어떻게 측정하느냐에 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들뢰즈와 과타리는 ‘분열-분석’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면 편집증적 투자와 분열증적 투자를 가르는 잣대 혹은 기준은 무엇일까? 들뢰즈와 과타리는 ‘원인’과 ‘목표’ 혹은 ‘이해관계’를 말한다. 원인과 결과, 즉 인과성에 의한 접근, 또는 목표(혹은 이해관계) 지향적인, 즉 목적론적 접근 말이다. 원인과 목표(이해관계)는 서로 통하는데, 현재의 행동(원인)이 특정한 목표(이해관계)를 달성(결과)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논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이에 대립해서 제시하는 것이 ‘과정의 완성’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에 충실하라는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편집증적 투자와 분열증적 투자가 칼로 무 베듯 딱 갈라지는 거라면 얼마나 속 편하겠는가? 이 둘은 경향성에 불과하지 종점이 아니다. 따라서 ‘이제 끝’이라고 선언할 수 없으며, 『천 개의 고원』에서 묘사되는 나무와 리좀처럼 서로가 상대 방향으로 역전될 수 있다. “예속 집단들은 혁명적 주체 집단들에서 끊임없이 파생한다. 공리 하나 더 추가요.”(450/618) 혁명적 주체 집단일지라도 공리를 하나 추가해 자리를 주면 예속 집단이 되고 만다. 한편 “자본주의는 모든 끄트머리를 통해 끊임없이 도주한다. . . 주체 집단들이 단절을 통해 예속 집단들에서 파생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흐름 들을 옥죄고 흐름들을 절단하고 절단을 미루지만, 이 흐름들은 끊임없이 흘러넘치며, 자본주의에 맞서 대항하고 자본주의를 베어 버리는 분열들을 따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절단한다”(451/618) 여기서 ‘도주’로 번역한 프랑스어 fuir는 ‘누수’라는 뜻을 동시에 지닌다. 오래된 건물의 파이프에서 물이 새듯 새어나간다는 뜻이다. 녹이 슬거나 쥐가 갉았거나 아니면 압력에 짖눌렸거나 간에 말이다. 들뢰즈가 푸코와 갈라지는 지점도 이곳이다. 푸코는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권력관계, 즉 지배 상황을 깰 돌파구를 제시하기 어려운 반면, 들뢰즈는 모든 사회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고 분석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후자의 방향성, 즉 예속 집단에서 주체 집단이 빠져나오는 국면을 설명할 때 “인과성의 단절”(452/620)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목표들과 이해관계들을 문제 삼는”(같은 곳) 일을 가리킨다. 이 일은 “욕망의 난입”(같은 곳)에 의해 일어난다. “예속 집단들에서는, 욕망은 아직도 원인들과 목표들의 질서에 의해 정의된다. . . 반대로 주체 집단들은 인과성의 단절, 혁명적 도주선을 유일한 원인으로 삼는다.”(452-453/620)
마쓰모토 준이치로가 인용한 대목은 이런 논의에 뒤이어 등장한다. 이 맥락에서 해당 구절을 다시 해석하자면. ‘혁명적 잠재력’이 지금의 현실에 분출하는 것은 서로 같으면서 표현만 달리 하는 세 가지에 의해서이다. 1) 어떤 정확한 순간에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 2) 욕망을 그 유일한 원인으로 지니고 있는 분열의 실효성, 3) 인과성의 단절(이것은 심지어 현실계에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한, 이상하게 다의적인 이 순간을 생산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과성의 단절’은 ‘원인’, ‘목표’, ‘이해관계’와의 단절을 가리키지, ‘자본과 노동이 만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능세계(조건법)의 상상, 우화, 가설, 허구를 뜻하지 않는다.
하지만 논의는 여기서 멈출 수 없으며, 멈춰서도 안 된다. 마쓰모토 준이치로는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이하게 다의적인 순간”(나의 번역: “모든 것이 가능한, 이상하게 다의적인 이 순간”)의 출현이 ‘자본과 노동이 만나지 않았다면’이라는 반사실적(counter-factual) 상상, 우화, 가설, 허구에 의해 가능해진다고 본다. 하지만 저자가 인용한 구절 바로 다음에 이런 문장들이 이어진다.
“물론, 분열은 원인들, 목표들, 이해관계들의 땅 밑 작업에 의해 준비되어 왔다. 물론, 원인들의 이 질서는 새로운 사회체와 그 이해관계들의 이름으로 다시 닫히고 틈바구니를 메워 버릴 위험이 있다. 물론, 역사는 집합 및 큰 수들이라는 동일한 법칙들에 의해 끊임없이 지배되어 왔다고 늘 나중에는 말할 수 있다. 남는 것은, 분열은 그것을 그려 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목표도 원인도 없는 욕망에 의해서만 실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분열은 원인들의 질서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다른 질서에 속하는 어떤 것에 의해서만 현실적이 된다.”(454/621-622)
들뢰즈와 과타리는 ‘물론’이라는 단서를 세 번 붙인다. 여기에는 역사(사건이 아닌 서술로서의 역사를 가리킨다)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듬뿍 담겨 있다. 우선 분열은 원인, 목표, 이해관계 들의 기저에서 준비되고 발생한다는 점이 지적된다. 표면이 아니라 그 밑을 봐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로 원인과 이해관계도 다른 원인과 이해관계에 의해 바뀔 여지가 있다고 지적된다. 이는 거시적이고 표면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뜻한다. 셋째로 역사는 ‘늘 나중에는’ 원인, 목표, 이해관계 들만 남긴다. 서술된 역사를 통해서는 분열을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분열은 ‘목표도 원인도 없는 욕망’에 의해 현실에 발생한다. 분열은 원인과 이해관계를 입고 있지만, 양자는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잘 알려진 구별법을 빌려 표현하면, 전자는 ‘분자적’ 차원의 일이고 후자는 ‘그램분자적’ 차원의 일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과 무의식 수준에서의 분석, 즉 분열-분석의 힘을 믿는다. “우리가 욕망을 혁명의 심급으로 내세운다면, 그 까닭은 자본주의사회가 이해관계의 많은 표명들은 견딜 수 있어도 욕망의 그 어떤 표명도 견딜 수 없기에, 욕망의 표명은 심지어 유아원 수준에서조차도 자본주의사회의 기본 구조를 폭파하기에 충분하리라고 우리가 믿기 때문이다.”(456/623-624) 앞에서도 보았지만, 욕망과 무의식 수준에서는 원인, 목적, 이해관계란 허깨비(/허위의식,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물론 사람을 홀리는 강력한 허깨비이긴 하다. 그러나 욕망과 무의식은 이 허깨비를 몰아낸다. 축귀 혹은 퇴마 의례처럼 말이다.
욕망과 무의식 수준의 분석은 ‘과정의 완성’을 지향한다. “과정을 완성할 것, 과정을 멈추지 말 것, 과정을 공전시키지 말 것, 과정에 목표를 주지 말 것.”(458/627) 나아가 어느 날인가 치료의 장소로 바뀔 새로운 지상은 “욕망적 생산의 과정의 완성과 일치한다. 이 과정은 진행하고 있는 한, 그리고 진행하는 만큼 언제나 이미 완성되어 있다.”(458/628) 들뢰즈와 과타리는 니체가 예고한 ‘새로운 지상’의 출현을 『안티 오이디푸스』의 맺음말로 삼는다.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과정의 완성’이란 무엇인가? 인용문에는 ‘욕망적 생산의 과정의 완성’이라고 설명된다. 사실 ‘과정’에 관한 논의는 『안티 오이디푸스』 1장 1절(9-11/26-28) 및 2장 9절(155-163/232-242)에서 이미 자세히 다룬 바 있다. 이 대목으로 가서 살펴야 하는 이유다.
“과정이란 무엇인가?”(9/26)라는 물음에 대한 첫 번째 답변은 이렇게 제시된다. “등록과 소비를 생산 자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등록과 소비를 단 하나의 동일한 경과의 생산들로 만드는 것.”(10/27) 우주 삼라만상을 ‘생산’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답변은 이렇다. “인간은 만물의 왕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온갖 형태 또는 온갖 종류의 깊은 삶과 접촉해 있으며, 별들 및 동물들도 짊어지고 있고, . . . 우주의 기계들의 영원한 담당자이다.”(10/27) 인간은 우주 삼라만상의 비특권적 일부라는 뜻이다. 끝으로 셋째 답변을 보자. “과정은 목표나 끝(fin)으로 파악되면 안 되며, 과정 자체의 무한한 계속과 혼동돼서도 안 된다.”(11/28) 이런 것들은 병원에서 보는 분열증 환자나 자폐증 환자를 낳을 뿐이다. 오히려 과정은 『아론의 지팡이』에서 D. H. 로런스가 사랑에 관해 말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과정은 완성으로 치달아야 하며, 영혼과 육체가 궁극적으로 사멸해 버릴 어떤 끔찍한 강화와 극단으로 치달아서는 안된다.”(11/28 재인용) 이 언급은 『천 개의 고원』에서 강조하게 될 덕목인 ‘신중함(prudence)’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과정을 완성한다는 말은 그때그때 최고점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타성화되고 습관화된 사랑이 아니라 그때그때 완성되는 사랑과 마찬가지여야 한다. 여기까지가 『안티 오이디푸스』의 서두에서 언급된 ‘과정’과 ‘과정의 완성’의 의미이다.
과정을 사는 인간이 분열자다. 물론 병원에 갇힌 환자로서의 분열자가 아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분열자가 차라투스트라와 같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분열자들은 엄청난 괴로움들, 현기증들, 병들을 알고 있다. 분열자들은 자신들의 유령들을 지니고 있다. 분열자들은 몸짓 하나하나를 새로 발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인간은 자유롭고 책임이 없고 고독하고 기쁜 인간으로, 마침내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 명사로 단순한 어떤 것을 말하고 행할 수 있는 인간으로 생산된다.”(156/233) 『경험의 정치학』에서 R. 랭이 말한 것처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미래의 인간들은 우리가 분열증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빛이, 종종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너무나도 닫힌 마음의 균열들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형식들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것이다. (…) 광기는 반드시 붕괴(breakdown)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돌파(breakthrough)일 수도 있다.”(157/234 재인용) 그렇다, 과정의 완성은 붕괴가 아니라 돌파다. 그것은 J. M. W. 터너의 후기 그림과도 같다. “모든 것이 흐릿하며, 바로 거기서 (붕괴가 아닌) 돌파가 생산된다.”(158/235) “우리는 화가 터너에게서, 종종 <미완성> 그림들이라 불리는 가장 완성된 그림들에서 이를 본 적이 있다. 천재가 나타나자마자, 더 이상 어느 유파에도,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고, 하나의 돌파를 행하는 어떤 것이 생긴다. 그것은 목표 없는, 하지만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과정으로서의 예술이다.”(443/609-610)

과정의 완성은 자본주의와의 싸움에 필수불가결하다. 자본주의를 정의하는 수많은 방식이 있을 수 있겠으나,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아버지 자본이 아들 자본을 낳으면서 그것을 자신에게 회수하는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자본』 1권 2부 4장에서 맑스의 말처럼 “10파운드의 잉여가치를 통해서만 미리 지급한 100파운드는 자본이 되기 때문이다.”(269/387-388 재인용) 만일 아들을 낳지 못하면 아버지는 결국 소멸한다. 자본의 모든 운동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필연이다. 손실이 누적되면 원금 자본은 0으로 수렴한다. 즉,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자본은 자살하는 자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위협은 ‘돈 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어떤 일을 하되 돈 벌이를 위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적이 되고 만다. 그는 오직 순간의 충만함만 추구한다. 그는 ‘욕망적 생산의 과정의 완성’을 추구하는 ‘자유롭고 책임이 없고 고독하고 기쁜 인간’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건 매우 어렵다. 문학가와 예술가에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지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모든 작가는 팔린 자이다.”(160/238) 이런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돌파를 시도해야 한다. “유일한 문학은 자기 꾸러미 속에 폭발물을 장치하여, 위조화폐를 만들고, 자기의 표현 형식인 초자아와 자기의 내용 형식인 상품 가치를 폭파한다.”(같은 곳) 이는 예술이나 문학뿐 아니라 모든 기계가 해야 할 임무이기도 하다. “억압-탄압 체계의 약해진 틀속에서 이것들을 작동시키는 외래적 관계들 속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이것들이 단 하나의 욕망 기계를 배양하는 흐름 속에서 서로 부품이 되고 톱니바퀴가 되고 또 일반화된 폭발을 위해 참을성 있게 점화된 그수만큼의 국지적인 불이 되거나, 이 둘 중 하나”(160/242)다.
같은 어려움은 반 고흐의 편지(1888년 9월)에서도 발견된다. “어떻게 이 벽을 가로질러야 할까. 강하게 두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이 벽을 파고 줄로 갈아 가로질러야 한다, 내 느낌에 천천히 참을성 있게.”(162/241-242 재인용) 이 구절은 내 박사학위논문의 맺음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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