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자는 왜 모방하는 걸까?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모방 대상이 더 좋고 가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가끔 후지다고 느끼는 걸 모방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더 넓은 맥락에서 그 후진 것을 포함하는 더 큰 모방 대상에 이끌리는 것일 뿐이다.
이제 관건은 잘 모방해내느냐 아니냐일 테고, 결국 잘 모방하는 것이 능력임이 확인된다. 더 나아 보이는 것을 모방하라. 이것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행동 지침이다. 남보다 먼저 빨리 잘 모방하면 앞서게 된다. 이것이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타르드에게 놀라운 점은 19세기 끝에서 ‘모방’의 중요성을 외쳤다는 점이다. 다들 ‘창의’를 전면에 내세우던 시기에 말이다. 물론 타르드는 ‘창의’, 즉 발명과 발견도 중시했다. 하지만 “모방되지 않는 혁신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모방의 법칙», 한글본, 205쪽)는 말로 모방을 창의와 같은 수준으로 승격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문장에서 ‘사회적으로’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타르드는 ‘개인적으로’ 발명과 발견이 좁은 범위에서 유용하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의 소멸과 함께 그 발명과 발견이 소멸한다는 다분히 진부한 진실을 되풀이한 것일 뿐이다. 요컨대 혁신은 ‘사회적으로’ 전파에 의해서만 유의미해진다. 전파에 동참하는 능력자들, 곧 모방자들이 혁신의 사회적 의미를 창조한다.
타르드가 통찰한 지점이 ‘생각의 싸움'(내 책 제목이고, 내 유튜브 채널의 제목으로 썼다)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타르드는 모방과 발명의 관계를 결국 관념 간의 충돌(만남, 연합, 결합, 상쇄 등을 포함한다)로 이해한다. 만난 대상이 더 나을 땐 모방하고 아닐 땐 (할 수 있다면) 발명한다는 식이다. 이것이 생각의 싸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생각의 싸움은 결국 물리적 싸움과 구별해서 이해해야 한다. 물리적으로 강한 것이 생각을 지배하는 일도 많지만, 생각은 물리와 구별되는 층위이고, 고유의 논리가 있다.
지금의 현실을 둘러보자. 사람들은 사회적 수준에서 무엇을 추구하는가? 즉, 무엇을 모방하려 하는가? 절대적으로 ‘돈’이다. 전 세계가 다 그러하다. 오늘날 모든 것, 주로 물건의 형태로 현현하는 모든 것은, 다 위신재다. 말하자면 그 물건의 소유자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상징이다. 집, 차, 옷, 음식, 액세서리, 여행, 파트너, 취향, 심지어 비트코인까지도.
비트코인이 아나키즘의 상징이었을 수는 있다. 적어도 초기에는. 그러나 비트코인은 돈 자체일 뿐, 혹은 돈을 증식하는 수단일 뿐, 현재 다른 가치가 남아 있는가? 오늘날 모든 것이 돈의 징표하는 점은 이미 19세기 중반 맑스가 밝혔으며, 이를 ‘물신’이라고 적절하게 명명했다. ‘가치’를 언급하는 이들 중에 ‘가격’을 빼고 언급되는 부분이 얼마인지 따져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는 가치의 대부분이 가격임이 확인되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다른 발명과 다른 모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19세기의 때 이른 통찰들이 21세기에 부활하면서 현행적 힘을 가질 수 있을까? 맑스, 니체, 그리고 타르드까지 이어지는. 흥미로운 시대임에 틀림없다.
202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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