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이란 무엇인가? (2003년의 글)

  • 2003년에 출간된 아래 책에 쓴 한 꼭지 글입니다.
  • 최근의 세계적 동향에 대해 살피기 전에 기초가 될 글이라 여겨집니다.

투쟁의 시대 80년대에, 거리에서 가장 많이 들리던 말의 하나가 ‘군사 파쇼’였다. 우리에게 각인된 파시즘(fascism)의 첫 인상은 그것이었다. 파시즘을 말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자꾸만 거대한 괴물의 모습이 연상된다는 점이다. 나치당의 히틀러나 파시스트당의 무솔리니뿐 아니라 한국의 박정희나 전두환까지도 모두 파시스트인 것이다.

그러나 ‘군사 파쇼’라는 말은 용법의 확장일 수는 있지만 오히려 파시즘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 파시즘은 독재(군사독재도 포함하는)와는 달리 권력의 사용에 있어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독재는 폭력과 강압의 형태로 권력을 사용한다. 반면 파시즘은 물론 그런 형태의 권력도 행사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유혹과 선동의 형태로 권력을 행사한다. 즉 민중의 자발적인 동의가 파시즘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주요 원천인 것이다. 특히 파시즘은 자발적 예속이라는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스피노자는 이 문제를 다음의 문구로 요약한 바 있다. “왜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의 문제이기라도 한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는가?”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파시즘은 오늘날도 주목의 대상이 된다. 사실, 지나가버렸고 그래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면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다. 하지만 파시즘은 바로 우리 시대의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역사적’ 파시즘 말고 오늘날의 파시즘, 즉 푸코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에 출몰하는 파시즘, 우리가 권력을 사랑하도록 만들고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바로 그것까지도 욕망하게 만드는 파시즘” 말이다.

언론학자 강준만의 분석은 이 점에서 돋보인다(«대중매체 이론과 사상», 개마고원, 2001). 그는 “대중매체와 선전 선동”이라는 대목에서 파시즘 문제를 다룬다. 매카시(McCarthy)를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뒤이어 다룸으로써 강준만은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파시즘은 단순히 독재 폭력 정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함께 참여하는 권력 행사 방식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대중매체이다. 가령 조선일보는 “선별적으로 그것도 왜곡과 과장을 저질러가며 던져주는 정보 부스러기에 접하면서 자신이 세상 돌아가는 걸 제대로 깨닫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착각”에 기생하면서, 그 착각에 힘을 실어주고 또 그것을 재생산한다. 이런 대중매체의 권력 행사 방식이 부드러운 파시즘이다. 사람들이 조선일보가 나쁘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알면서도, 또는 그렇다는 것을 거의 모르는 채로 조선일보를 읽고 쓰면서 그것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사실은 파시즘의 문제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선일보의 권력 행사 방식이야말로 오늘날 파시즘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편 조선일보 문제를 둘러싸고 강준만과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임지현, 문부식 등은 우리의 일상 속에 내재해 작용하고 있는 파시즘에 주목한다. 이른바 우리 안의 파시즘(임지현 외 지음, «우리 안의 파시즘», 삼인, 2000). 이들은 우리가 거대한 폭력에 맞서 싸우면서 부지불식간에 그 폭력의 방식과 모습을 닮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재확인된 ‘자발적’ 지역주의는 ‘합의 독재’의 기반을 민중 스스로가 마련해주었다는 역설을 노정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들은 “민중은 독재 권력의 희생자였지만 동시에 공범자였다”는 통렬한 자기비판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파시즘의 결들이 거대한 파시즘을 낳는 주범이라는 사실이 발견된다. “법제적 민주화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무늬라면, 파시즘은 물밑에서 살아 움직이는 한국 사회의 결이다. 우리 의식과 일상적 삶의 심층에 내면화된 규율권력, ‘일상적 파시즘’의 극복이야말로 정치적 제도적 파시즘을 타파하는 요체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사람들을 일상적 파시즘에서 구출해내야 한다. 그래야 거시적 차원의 정치적 파시즘을 타파할 수 있다. 대중을 계몽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조선일보라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임지현 등의 입장은 얼핏 봐서는 들뢰즈+과타리와 통하는 것 같다(«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 그러나 들뢰즈+과타리가 미시 파시즘과 거시 파시즘을 동시에 주목하는 데 반해서, 임지현 등은 미시 파시즘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거대 파시즘을 작동케 하는 중요한 기제, 가령 조선일보 같은 부분을 지나치게 간과하거나 쉽게 보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모든 폭력을 총체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실천적 맥락에서는 이들의 순수주의가 행동에 장애가 된다. 즉, 이들의 입장은 거대 파시즘의 발생 원인을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하지만 거대 파시즘의 유통망 자체는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모든 저항을 무장 해제시킨다는 점에서 해롭기까지 하다.

김진석은 임지현 등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미시 파시즘을 그 자체로 파시즘이라 부르면서 거부하기보다는 그것이 거시 파시즘의 형태를 띠게 되는 순간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들뢰즈+가타리에 대해서도 미시 파시즘에 주목한 것은 좋지만 그것을 너무 직접적으로 거시 파시즘과 연관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김진석의 이러한 비판은 이론을 너무 순수주의 차원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대한 예방책으로 의미가 있다(«사회비평» 2002년 가을호).

그러나 거꾸로 거시 파시즘은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되물어 보면 미시 파시즘 분석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보면 70% 이상의 미국인이 지지한다고 하는데, 이 양상은 히틀러의 독일이나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별로 다르지 않다. 여기서 보이는 맹목적 애국심, 집단 광기, 뉴스쇼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일까? 아무래도 미국인들이 평소부터 파시스트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순수주의적인 입장이 아닌 한에서, 미시 파시즘 분석은 거시 파시즘 분석과 연결되기만 한다면 미래의 파시즘을 예방하고 경고하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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