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계와 욕망적 생산: 수동적 종합들
이제 반론이 시작됩니다. “욕망이 생산한다면, 그것은 현실계를 생산한다.” 욕망은 현실 세계 또는 영어로 ‘the real’을 생산한다. 라캉의 용어는 ‘the real’을 보통 ‘실재’라고 옮기죠. 그런데 들뢰즈·과타리한테 ‘실재’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요. 그냥 현실입니다. 있는 건 다 진짜 있는 거죠. 앞에서 설명한 것을 참고하세요. 심리적 현실과 물리적 현실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사기예요. 나는 ‘실재’보다 ‘현실계’로 번역합니다. ‘상상계’, ‘상징계’, 이런 것과 마찬가지로요. 이 말들에서 ‘계’는 ‘세계’의 ‘계(界)’가 아니라 ‘시스템’의 ‘계(係)’예요. 물론 들뢰즈·과타리는 상상계, 상징계 다 거부합니다. 상징계는 언어 세계에요. 현실 세계와는 분명 다른 세계예요. 현실 세계는 언어 세계를 압도하죠. 그래서 언어 세계만의 분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들뢰즈·과타리는 이점을 무척 강조합니다. 한편 상상계는 상상적으로 도입한 거예요. 그걸 확인할 길도 없어요. 상징계(the symbolic), 상상계(the imaginary), 현실계(the real), 이 셋을 구분할 때, 들뢰즈·과타리의 용어법과 라캉의 용어법이 완전히 다릅니다. 나는 일부 논쟁적인 지점에서 라캉의 용어를 차용해서 유통되는 한국어 번역을 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번역을 달리해서 들뢰즈·과타리의 철학에 맞게 바꿨습니다.
문단을 시작할 때, 중요한 선언이 몇 가지 나옵니다. 우선, 방금 본 문장. “욕망이 생산한다면, 그것은 현실계를 생산한다.” 그다음. “욕망이 생산자라면, 그것은 현실 속의, 그리고 현실의 생산자일 수 있을 따름이다. 부분대상들, 흐름들, 몸들을 기계 작동하며, 생산의 통일로서 기능하는 수동적 종합들, 욕망은 이런 수동적 종합들의 집합이다.” 들뢰즈·과타리의 용어에는 ‘수동적 종합’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수동적 종합’은 ‘생산하기’와 ‘생산물’의 관계에서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뭔 얘기냐면, ‘생산하기’는 결정론적이지 않아요. 생산하기는 어떤 원리나 법칙에 따라 생산물을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우연 혹은 우발의 계기가 개입하기 때문에 그래요. 따라서 생산물은 결국 생산하기 또는 생산자가 능동적으로 형성해내는 결과물이 아니에요. 생산물로부터 그것이 빚어지기 전에 모종의 활동과 우연이 개입되었다는 게 확인될 뿐입니다. 그래서 생산물은 수동적 종합의 결과입니다. 항상 수동성의 측면에서 볼 수밖에 없어요. ‘능동’이란 자기가 결과에 대한 전적인 원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과정을 통제한다는 말이죠. 그게 능동이라는 말의 가장 정확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전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우연과 우발성이 개입하게 되면, 결과물은 내 손 밖에 있게 됩니다. 그랬을 때는 그 결과물은 수동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습니다. 그래서 수동적 종합이 우주의 생성의 본질입니다. 이런 수동적 종합의 끝없는 반복이 우주의 운행과 경과인 거죠. 중간에 개입하는 것이 ‘부분대상들, 흐름들, (기관 없는) 몸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든 결합하고 해체하는 과정들을 겪어가죠. 그래서 “욕망이란 이런 수동적 종합들의 집합”이라고 선언한 거예요. 집합이라는 건 시간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죠. 계속 진행되니까요. 그 진행 전체를 관통하는 추진 에너지, 내재적 에너지, 이 수동적 종합을 작동시키는, 가동시키는 내적 힘이 욕망입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현실계는 수동적 종합들에서 생겨난다. 현실계는 무의식의 자기-생산으로서의 욕망의 수동적 종합들의 결과물이다.” 중요한 구절입니다. ‘자기-생산’이라는 말이 모순인 건 확인할 수 있죠. 자기가 어떻게 자기를 생산할 수 있겠어요? 딱 하나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바로 전체로서의 우주입니다. 전체로서의 우주가 지금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게 우주가 자기 생산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무의식의 자기-생산’이라는 말을 해요. 무의식이 심리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개념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무의식이 우주의 자리에 위치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주가 무의식입니다.
우주적 무의식은 이미 베르그손에게서 찾아볼 수 있어요. 《베르그손주의》나 1960년대에 쓴 베르그손 관련 논문에서 잘 확인됩니다. 나의 박사학위논문에서도 정리해놨고, 《베르그손주의》의 해설 논문에서 더 자세히 정리했어요. 무의식이 곧 우주니까 ‘우주의 자기-생산’인 거고, 그게 욕망의 수동적 종합이라고 다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체이다.” 이때 주체는 인간학적인 차원에서 이해되는 주체입니다. 왜냐면 욕망 자체가 자기 추동력이 있다면, 그건 어떤 의미에서 주체거든요. 우주 자신이라는 의미에서 주체일 수 있어요.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욕망은 인간학적 차원의 주체를 결핍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존재론적 차원의 생산의 과정의 결과물로서 주체가 탄생합니다. 순서가 그렇게 되요. “또는 고정된 주체를 결핍하고 있는 것이 욕망이다.” 결정론적으로 결과를 낳는 원인으로서 주체가 없다는 말이지요.
다음 문장에 나오는 ‘탄압’은 프랑스어 ‘레프레시옹(repression)’인데, 앞에서 설명했듯이 ‘르풀르망’, 즉 ‘억압’과 다른 말이지요. ‘탄압’은 사회적 수준에서의 억압입니다. 탄압을 “고정된 주체”가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계속 변하는 데, 즉 아이텐티티(동일성, 정체성)라는 것은 없는데, 그것을 특정하게 규범화하면 아이덴티티가 생기죠. 아이덴티티는 사회가 변화하고 있는 개인에게 부여하는 거죠. 아이덴티티를 부여하면 여러 기능을 하죠. 대표적으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법적이고 도덕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고정시켜 놨기 때문에 필요한 위치에서 적절한 부품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아이덴티티는 인간을 여러 모로 규제하고 제어하는 측면입니다.
말년의 들뢰즈는 ‘제어 사회’라는 개념을 발명까지는 아니고 주목하게 되는데, 그건 푸코가 말하는 ‘규율 사회’와 구별되는 사회적 제어 장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통찰입니다. 1989년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푸코도 제어 사회에 대한 착상이 없진 않았지만, 푸코가 주요하게 분석한 것은 규율 사회였습니다. 규율 사회란 한 번 규율이 사람에게 주어지면, 트레이닝이죠, 그대로 행한다는 겁니다. 벤덤의 원형감옥이 모델이었어요. 훈련된 규범을 그냥 따르는 거예요. 가정의 규율, 학교의 규율, 군대의 규율, 공장의 규율이 차례로 이어지지요. 규율 사회 다음에는 규율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기능을 발휘하도록 계속 따라다니면서 사람을 규제합니다. 딴짓 못하게 계속 관리합니다. 그런 관리를 들뢰즈는 ‘제어(control)’라고 부릅니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계속 스펙을 요구해요. 옛날에는 변호사 되고 의사 되면 평생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끝날 수가 없어요. 입학, 취직, 승진으로 이어질 때 계속 미세하게 뭔가를 요구해요. 자격 점수를 계속 높여야 하고, 자격 요건도 다변화됩니다. 딴짓할 시간을 계속 뺏는 거죠. 이런 식으로 사람을 쥐어짭니다. 이게 제어 사회의 한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들뢰즈는 구체적인 사례를 많이 언급하진 않아요. 컴퓨터와 인터넷이 초래한 새로운 상황이라고 말하는 정도입니다. ‘콘트롤’을 어떻게 옮기는 것이 좋을지도 관건입니다. ‘통제’로 많이 옮기는데, 나는 ‘제어’가 낫다고 봅니다. 통제는 억압적 느낌이 강합니다. 조지 오웰 식의 상황이죠. 반면에 제어는 당근과 채찍이 함께 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면도 있는 거죠. 들뢰즈는 후자를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자발적인 복종이 될 여지가 있다는 거죠.
고정된 주체, 또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주체는 이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말한 게 정확히 이 내용이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책에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계속 봅니다. “욕망과 그 대상은 일체이며, 즉 기계의 기계로서의 기계이다.” 뭐냐면, 욕망과 그 대상이라는 것은 생산하기와 생산물의 동일성이라고 보면 됩니다. 앞에서 설명한 적 있습니다. 그래서 기계의 기계로서의 기계입니다. 계속 보면. “욕망은 기계이며, 욕망의 대상 역시 연결된 기계이다. 그래서 생산물은 생산하기에서 채취되고, 생산하기에서 생산물로 가는 중에 뭔가가 이탈하며, 이것이 유목하고 방랑하는 주체에게 여분을 준다. 욕망의 대상적 존재란 현실계 그 자체이다.” 앞에서 설명했던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각주에 라캉에 대한 양면적 평가가 나오는데, 이것도 앞에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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