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우, 엄기호,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따비, 2020) 주요 구절

김성우, 엄기호,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따비, 2020)는 흥미로운 책이다.

문해력 혹은 리터러시라는 주제를 놓고 응용언어학자 김성우 선생과 사회학자 엄기호 선생이 나눈 대담을 정리한 것인데, 이 주제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 어지간한 범위를 망라하고 있다. 동의할 수 있는 내용과 그렇지 않은 내용이 두루 섞여있는데,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은 주로 두 저자의 생각 내적으로 충돌하는 지점과 관련된다. 즉, 책 전체에 걸쳐 내가 보기에는 서로 양립하기 어렵거나 부딪히는 견해가 병존하고 있다.

나의 생각을 마구 자극한다는 점에서 크게 도움을 얻었고, 내 정리된 생각은 다른 자리에서 제출토록 하겠다. 아래에 매력적인 구절들을 남긴다. 이미 워낙 유명한 책이라 읽을 분들은 다 읽었으리라 생각한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말하고 듣는 것이 읽고 쓰는 것으로 전환되었다면, 지금은 정보나 이야기를 ‘읽고 쓰는 게 아니라 ‘보고 찍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보를 습득하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는 것이죠. 저는 읽고 쓰는 것을 통해 의미를 파악하고 구성하는 사람들과 보고 찍는 것으로 그걸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세대 갈등에도 이런 측면이 깔려 있다고 보고요. (엄기호, 30-31)

확실히, 새로운 세대가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 텍스트를 기반으로 더 큰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떨어졌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죠. 그런데 저는 그런 지적이 너무 성인 중심의 관점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김성우, 31)

제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게, ‘리터러시를 문제 삼는 사람들의 리터러시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문제제기하신 것처럼 ‘이것이 리터러시다’라고 정의하는 것, 사회학적으로 보면 그게 바로 권력이거든요. 이것이 리터러시다 하면 저것은 리터러시가 아닌 것이 돼버려요. 그렇게 리터러시를 정의한 다음에, 그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문해력이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 |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로 낙인찍는 것, 그것이야말로 권력이죠. (엄기호, 36-37)

우리가 리터러시를 문제화하는 방식으로 위기가 아니라 변동이라고 말한 것은, 읽기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리터러시 전반의 위기라고 규정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취지였습니다. 분명 리터러시가 고전적인 문자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 앞에서 한 이야기였습니다. (엄기호, 75)

근대가 개인을 전면화시켰지만, 그 이전이라고 개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지식인, 특히 불교의 승려들은 다 개인이었어요. 이들이 개인일 수 있는 이유가 읽기라는 행위에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데, 읽는 순간에 인간은 고독해지거든요. 인간은 글을 읽으며 생각을 하잖아요. 생각은 대부분 혼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깊이 있게 골똘히 생각할 때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순간조차도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물러나 혼자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읽기는 고독한 작업이죠. 구술문화에서 듣는 것은 계속 공동체에 참여하는 행위예요. 이와 달리, 읽는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여행을 떠나는 거거든요. (엄기호, 90)

물론 구체성에 있어서는 텍스트가 영상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멀티미디어가 세계를 그대로 복사하고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런건 유튜브가 잘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신발 끈 묶는 법, 레이업슛 하는 법, 뜨개질 하는 법 같은 것들은 아무리 말로 해봤자 영상으로 보는 게 백배 낫습니다. 하지만 추상적 개념을 매개로 하는 사유, 예를 들어 존재라든가 과정, 관계, 사랑, 자유, 평등, 이런 것들을 개념화하고, 이를 체계화해서 사유의 틀, 나아가 이론을 만들고 소통하는 것은 영상으로 하기가 굉장히 힘들죠. (김성우, 96)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을 정리하면, 글을 쓰고 읽는 것이 말을 하거나 영상을 보는 것과 달리 인간의 사유하는 역량을 비약적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추상성이 높아짐으로써 보다 본질적인 것을 사유하게 되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 본질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그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체계적이고 치밀해야 합니다. 따라서 내 이야기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치밀한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바로 이것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인간의 사유역량을 비약적으로 높였다고 말하는 이유겠죠. 말로는 이 치밀함과 체계성을 도저히 담을 수 없거든요. (엄기호, 101)

길이가 짧아졌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가 볼 때는 사유의 길이와 스케일이 짧아지고 작아진 것입니다. (엄기호, 111)

복수성의 세계란 시간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시간을 공간화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한 공간에 여러 개가 있어야 복수성이라고 인지되니까요. 어찌 보면 기록이라는 것, 읽기라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해놓은 거죠. 한 공간에서 죽 읽게 되는……. 글을 쓴다는 것도 시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써놓는 순간 책이라는 공간에 들어가기 때문에 복수성이 | 담보될 수 있는 거예요. 복수성에 대한 역량,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복수성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복수성에 대한 감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 복수성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담론을 생산할 것인가를 가늠해낼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복수성에 대한 감각을 역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엄기호, 113-114)

내가 여기서 이걸 한 번 할 수 있었으면 다른 데 가서도 해낼 수 있어야만 그걸 역량이라고 할 수 있어요(세넷, 2010). 역량은 내 몸에 쌓이는 힘이고, 그 핵심은 유연함이에요. 왜냐하면 상황이라는 건 늘 바뀌니까요. 내게 추상화해내는 힘이 있다면 그 추상화한 개념을 구체화하는 힘이 생겨야 하는데, 이 방향은 깨져 있는 거죠. 사실 추상화하는 힘도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엄기호, 114)

변신은 인간의 오랜 꿈입니다. 하지만 신이나 천사 같은 존재와 달리 인간은 변신을 할 수가 없죠.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 가능성이 봉쇄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고, 이런 점에서 인간은 가능성을 빼앗긴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이 다른 존재가 되는 가능성을 빼앗긴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을 통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언어예요. 우리가 뭔가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할 때를 한번 생각해보죠.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만 그 이미지들이 다 언어적이죠. 말과 글입니다. 다른 존재에 공감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로 변신할 수 있게 하는 것. 생각에서라도 남이 되어보는 것, 그것이 역지사지이며, 아렌트는 그것을 사유라고 했습니다. (엄기호, 124)

어휘 발달은 단순히 단어량의 증가가 아닙니다. 단어의 의미를 계속 확장시켜나가고 깊게 만드는 거죠. 이게 다양한 맥락에서 단어를 적절하게 쓸 | 수 있는 능력과 연결돼요. 예를 들어 자유라고 하면, 어렸을 때 자유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거나 놀 수 있는 걸 의미했다면, 경험과 지식이 커지면서 학생의 자유가 되고 시민의 자유가 되고 인간의 자유가 되면서 ‘자유’라는 말의 폭이 커지는 거죠. (김성우, 132)

리터러시가 개인적 역량이지만 그 역량을 키우는 것은 사회적 역량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사회적 역량이 되었을 때만 많은 부분에서 나타나는 혐오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어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노인 혐오는 대표적으로 리터러시를 무기로 삼은 혐오예요. 무지하고 무식하다는 혐오죠. (엄기호, 139)

단순화시켜 말하면, 매체에 따라 우리 뇌의 활성화 패턴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어요. 패턴이 달라진다는 것은 우리 뇌가 달라진다는 것, 우리 몸의 습속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든 동영상이든 당장 필요한 지식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은 인간의 몸과 매체가 맺는 관계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고, 매체의 강점과 한계, 매체가 우리 머릿속에서 일으키는 변화, 매체의 사회적 영향 등을 무시하는 것이죠. 처리 과정 없이 산출물이 나올 수는 없잖아요. 매체를 사용할 때 수반되는 경험을 무시하고 써먹을 수 있는 지식만 결과로 보는 것도 위험하고요. (김성우, 151)

우리가 검색을 하면 필요한 지식이 바로 나온다는 것은 내재화의 가능성, 내재화 이후 숙성되는 과정의 가치를 생각하지 못한 발언이라고 봐요. 세상의 그 많은 ‘찾으면 나오는 지식’은 배울 필요가 없는가, 그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 지식들을 내 머릿속에 가져온 뒤 기존의 경험과 지식, 또 새로 들어올 지식과 버무리고 숙성시키고 발효시켜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또 내 삶에서 어떤 상황에 닥치든 그걸 끄집어내서 맥락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역량, 이걸 보통 지혜라고 부르잖아요. 그 지난한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찾으면 나온다고 하는 건 배움과 발달의 본질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김성우, 165)

긴 글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요약본을 원하죠. 이제 그들의 머리는 ‘요약하는 사람들’이 점령하게 되고요. 장문을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단순히 인내력의 문제가 아닌 거죠. 긴 글을 쓰고 읽어내는 건 어쩌면 요동치는 사회의 흐름을 이해하는 실천적 행위일지 몰라요. 인간과 사회, 세상사는 언제까지나 복잡할 테니까요. (김성우, 269)

토니 모리슨: “정의는 정의당한 자들이 아니라 정의한 자들에게 속하는 것이다(Definitions belong to the definers, not the def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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