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

[9년 전의 글]

역자와 출판사에서 각각 증정해 주겠다고 해서 고맙게 한 권 받아 완독했다. 독후감으로 사의를 표해야 하나, 아직 좀 바빠서 간략하게 평하겠다.

1. 이 책은 일본 학계의 저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선 들뢰즈&과타리의 전 저작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음은 물론, 다른 참고문헌들도 대체로 일본어로 접할 수 있다. 나아가 이와나미 100주년 기념의 1권으로 나왔다는 사정 또한 이 책에 대한 일본 학계와 출판계의 평가를 짐작케 해 준다. 이 책은 우노 구니이치가 쓴 《들뢰즈. 유동의 철학》에 이어 (내가 알기로는) 출간된 두 번째 들뢰즈(&과타리) 주석서이다. 우노의 책이 전형적인 개론서의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면, 고쿠분의 책은 문제 중심으로 파고드는 비판적 읽기의 모범으로 보인다(일본 사상계에 특유한 ‘자기화 읽기’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2. 고쿠분의 장점은 일본 학계가 그 동안 이루어 낸 성과를 효과적으로 요약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물론 고쿠분은 원전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번역과 논문을 제공한 일본 학계의 위대함이 있다. 나는 고쿠분의 책을 통해 일본 학계의 들뢰즈 연구의 최전선을 목격했다. 읽는 내내 스릴 넘치는 기분을 느낀 것은 그 최전선에서의 만남 덕분이었다. 아, 얼마나 연구가 진행되어 있을까? 몇몇 일본 학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나눈 적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이 ‘선수’로 내세운 고쿠분은 입맛을 돋구었다.

3. 이 책에는 장점과 단점이 혼재한다. 내가 코멘트로 절반 정도 읽을 때까지의 긍정적 감상을 적었었는데, 나머지 절반을 읽으면서는 부정적 느낌이 커졌다. 다행인지 아닌지, 내가 이 정도 책을 아직 쓰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대결할 만하다는 생각이 커졌다. 이 책이 여전히 담고 있는 어떤 몰이해를 푸는 일이 시급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몰이해는 현재 세계 들뢰즈 학계 전반이 직면하고 있는 몰이해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4. 먼저 장점을 적시하자. 한국 학자들이건 서구 학자들이건 잘 다루지 않는 글들을 세밀히 읽고 있다는 점이 최대 장점이다. 물론 나는 학위논문에서 그 중 몇을 다루었고 겹치는 글이 상당히 있다는 점에서 반갑기도 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대체로 잘 알고 있으며, 왜 고쿠분이 그 글들에 주목하게 되었는지 저간의 사정과 그의 문제의식에도 동감할 수 있었다. 한국 독자가 이 책을 꼭 읽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곳에서 접하기 힘든 글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접할 수 있으니까. 하나 더 덤이 있다면, 들뢰즈의 사생활과 관련된 몇 가지 궁금한 점이 해소될 수 있기도 하다.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1장과 2장이었다. 흄을 논의의 출발에 놓고, ‘무인도’나 ‘투르니에 론’ 등 몇몇 글을 통해 타자 이론에 주목하고, 이를 다시 칸트와 결합하는 대목은 압권이었다. 그렇게 정립된 ‘초월론적 경험론’이 들뢰즈 철학 자체이기도 하다는, 1장에서 던진 물음에 대한 답변 제출 또한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3장부터 동의하기 힘든 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다시 ‘초월론적 경험론자’로서의 들뢰즈의 면모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을 낳는다. 왜냐하면 들뢰즈가 그렇게 규정되는 이상, 그 너머로 나아가는 길이 막히게 될 터이니까. 가령 다음 구절을 보자.

“이 책은 들뢰즈가 하나의 실천을 통해 스스로의 과제를 극복해간다는 큰 스토리에 기반을 두어 쓰였다. 그렇지만 거기에 부가해두어야만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 그것은 가타리(sic.)와의 협동작업이라는 실험을 거친 뒤 들뢰즈가 완전히 다른 철학자가 되어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들뢰즈는 가타리(sic.)와 작업을 할 때에만 욕망의 배치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사람으로 작업을 할 때에는 언제나처럼 초월론적 경험론의 철학자 질 들뢰즈로 들아가 버린다.”(265~266쪽) cf. ‘과타리’라는 표기에 대해서는 위키백과의 ‘과타리’ 항목 참조.

요점은 들뢰즈는 ‘언제나’ 초월론적 경험론자였다는 건인데, 이런 사전 규정 또는 작업 가설은 논의의 틀을 제한해 버리고 만다. 나는 이 논점에서 고쿠분에 동의할 수 없다. 어떻게 한 학자가 10년 넘게 행한 작업(과타리와의 협업)을 그렇게 쉽게 망각할 수 있을까? 더욱이 자신이 섭렵한 선배들을 체화하는 일에 그토록 능한 들뢰즈가. 이는 상식적으로도 문헌적으로도 동의하기 어렵다.

5. 자연스레 단점 또는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점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우선 3장 후반의 다음 진술부터 보자.

“들뢰즈는 자기 철학의 어떠한 한계를 눈치 채고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 하나의 실천, 거의 도박이라고 해도 좋을 실천으로 나아갔다.”(124쪽)

여기서 말하는 실천이 바로 과타리와의 협업이다. 그렇다면 어떤 한계인가? 그것은 주라비슈빌리가 말하는 ‘비주의주의(非主意主義)’ 철학이라는 평가이다. 들뢰즈는 의지를 부정하기 때문에 정치철학이 성립하기 어렵다는 내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비주의주의’라는 주라비슈빌리와 고쿠분의 평가가 틀렸다고 본다. 이런 평가가 나온 것은 지금까지의 들뢰즈 연구가 대체로 그랬듯이 ‘니체’를 지나치게 소홀이 취급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 책도 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베르그손, 푸코, 나아가 프로이트와 자허마조흐에 대해서는 상세히 분석하는데, 니체는 존재감이 없다. 그러나 들뢰즈가 침묵의 시기를 빠져나오면서 발한 일성은 《니체와 철학》(1962)이었다! 들뢰즈가 해석한 니체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 개념의 하나가 ‘힘과 권력의지’이며 이는 10년 뒤 ‘기계와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다. 더욱이 《니체와 철학》은 문명 비판을 목표의 하나로 삼는다. 즉, 근본적으로 정치철학 저술이다. 니체의 결여가 고쿠분의 관점을 낳았고, 몰이해를 낳았다는 것이 나의 평가이다. (나는 1년 반 넘게 대안연구공동체 www.paideia21.org에서 《니체와 철학》 강독 강의를 완성했고, 강의록을 정리해 심도 깊은 해설을 출간할 계획이다. 이 말은 그만큼 꼼꼼히 한 줄 한 줄 읽었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들뢰즈는, 많이 오해되는 용어이긴 해도 달리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에 쓰자면, ‘욕망의 철학자’이지 ‘비주의주의자’가 아니다.

둘째 논점은 정신분석과의 관계와 관련된다. 들뢰즈는 과타리와 협업하면서 “정신분석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그것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접속하여 ‘욕망 일원론의 철학’의 원리를 구축한 저작”으로서 《안티 오이디푸스》(1972)를 썼다고 고쿠분은 평가한다. 이는 세간의 일반적 논의, 특히 일본 학계의 정설을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평가할 때, 《안티 오이디푸스》는 니체와 마르크스를 결합해 정신분석을 그야말로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책으로, 특히 4장 3절에서 그 점이 충분히 강조되어 있다. 가령 다음 진술.

“관료 장치나 군사 장치 못지않게 정신분석도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메커니즘이며, 정신분석은 바깥에서 외래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사회적 기능이 정신분석의 형식과 합목적성 자체를 표시한다. […] 정신분석 전체가 하나의 어마어마한 변태이고, 하나의 마약이고, 욕망의 현실을 비롯한 현실과의 근본적 절단이고, 나르시시즘이고, 괴물 같은 자폐증이다. 그것은 자본 기계의 고유한 자폐증이며 자생적 변태이다.”(《안티 오이디푸스》, 한글본 520쪽)

요컨대 자본주의를 잘 기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이라는 것이다(실제로 그러한지 여부보다 들뢰즈&과타리의 평가가 그렇다는 점에만 일단 주목하자). 고쿠분은 바로 이 4장을 쓰기가 가장 어려웠다고 술회하는데, 아마도 이해가 잘 안 되어서 논리적인 논증 구성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으리라.

셋째이자 마지막으로 중요한 논점은 5장과 특별히 관련되어 있는데, ‘욕망’에 대한 인간주의적 이해이다. 들뢰즈&과타리가 그토록 여러 번 욕망이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고 강조했건만, 마치 니체가 권력의지가 ‘기성 권력의 추구’가 아니라고 그토록 반복해서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오해되었던 것과 똑같이, 욕망은 여전히 ‘인간 욕망’인 것처럼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 측면은 고쿠분 개인만의 몰이해는 아니고, 국내외를 불문하고 다른 많은 논자들 역시도 몰이해한 부분이다. (내 학위논문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_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13.02) 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내 논문 3장 D절 “기계와 욕망”과 고쿠분이 4장에서 다룬 논의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6. 쓰다 보니 꽤 길어졌다. 고쿠분은 후속작을 예고하며 글을 마쳤다. ‘들뢰즈&과타리의 철학원리’가 먼저 나오고, ‘들뢰즈&과타리 저작의 총체’를 다룬 책이 그 다음이라고 한다. 곧 고쿠분과 만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그 전에 글로 내 의견을 충분히 담아 전달하고 의견을 듣고 싶다(물론 영어로). 아무튼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책 제목은 너무 선정적이다. 그냥 원제목을 따랐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들뢰즈의 철학원리》), 아니 그 편이 더 좋았을 것 같다. 끝으로 번역 상태를 보면, 서두른 느낌이 강하다. 전반부는 그런대로 다듬어져 있는데, 후반부는 번역 용어도 왔다갔다 하고 일본어 표현이 그대로 노출된 경우도 많다. 시간상의 문제였다고 보인다. 역시 문제는 시간이다.

(2015 .7.4.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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