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024

극장이냐 공장이냐?

다음 절로 갑니다. 지금 가짜 유물론을 비판하려고 합니다. 분열증에 대한 세 가지 대표적인 특징이 열거되는데, 크레펠린(Kraepelin), 블로일러(Bleuler), 빈스방어(Binswanger), 셋 다 정신의학자입니다. 이 사람들이 찾아낸 개념인 해리(관념 해리라고도 합니다), 자폐증, 시-공간 또는 세계-내-존재입니다. 첫째 개념은 특수한 장애입니다. 둘째 개념은 이해를 돕기 위해 도입된 분열자의 특징입니다. 자폐증에서 보이는 망상은 외부 현실과 단절되어 내부 현실 또는 심리적 현실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셋째 개념은 몸을 매개로 분열증을 자아와 관련시킵니다. 시-공간도, 세계-내-존재(원래 하이데거가 썼던 표현이죠)도 분열자의 특유한 세계입니다.

하지만 “엄마-아빠처럼 분열자가 오래 전부터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엄마-아빠-나라는 관계를 넘어서 있다는 거예요. 원서 21쪽에서 아르트가 했던 표현, “난 아버질 믿지 않아 / 어머니도 / 난 / 엄마-아빠 게 아냐”에도 나오고 “그래, 나는 내 아버지였고 나는 내 아들이었다. <나, 앙토냉 아르토, 나는 내 아들이고 내 아버지고 내 어머니고 또 나다.>”에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분열자는 자아를 설정하지 않습니다. 자아라는 건 자식의 위치에 놓이는 데, 그런 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부분에서, 왜 정신의학자들이 분열자에 대해 ‘그가 떠나온 곳’, 즉 자아죠, 결국, 그곳으로 다시 그를 데려가려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아를 회복시켜 주는 게 치료의 목적으로 설정되잖아요.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하는 거죠. 그래서 분열자는 ‘나라는 말’을 할 수 없으니 다시 ‘나’를 말할 수 있게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분열자는 이렇게 대꾸하고 맙니다. “또 나를 잡치는구먼.” 앞(16회 강의)에서 이 대목을 보았었지요? 결국 나라고 말하건 말하지 않건 상관없는 지점에 도달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왜냐면 나라고 말할 때 그 나는 사실상 주어 자리에 오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뿐이죠. 실체, 자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도 저 정신의학자들과 같은 식으로 태도를 취했습니다. 프로이트 자신은 분열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죠. 그래서 슈레버도 ‘편집증’이라고 불렀습니다. 또는 조발성 치매라는 말을 쓰기도 했었습니다. 프로이트도 분열자를 다시 자아로 축소하고 엄마-아빠-나라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 가둬놓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 작업을 들뢰즈·과타리는 ‘정신분석적 제국주의’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에 흥미로운 진술이 나옵니다. “조금도 숨길 것이 없는 일이겠는데, 결국 프로이트는 분열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핵심은 이겁니다. “그는 오이디푸스화에 맞선 저들의 저항을 좋아하지 않는다.” 분열자는 자꾸 저항하고 부수고 가족 삼각형의 틀을 넘어서니까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프로이트는 분열자들을 “짐승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프로이트는 말하기를, 분열자들은 “철학자를 닮았는데, 철학자를 닮았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네요. 프로이트가 철학자를 어떻게 여겼는지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 대목에서 분열자를 지칭하며 철학자와 닮았다고 할 때 열거한 특징들은 실은 철학자의 특징입니다. 전이가 안 되고 따져 묻기를 좋아하는 건 철학자의 특성이죠. 사제 권력을 믿고 따르고 아버지로 여기는 걸 철학자는 거부하고 극복하고 심지어 파괴합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 철학을 대체할 거라고 희망했습니다. 아마 슈레버 분석하는 글에 언급되었던 내용 같아요.

이어서 보겠습니다. “충동들과 징후들의 관계, 상징과 상징된 것의 관계를[…]”. ‘충동’은 안에 들어 있는 힘이고, ‘징후’는 그 충동이 표출된 거죠. 징후를 보고 내적 충동을 찾아가는 작업을 합니다. 그 다음에 ‘상징’과 ‘상징된 것’. 상징은 징후와 대응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상징된 것은, 가령 꿈에서 펜을 봤는데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느냐, 라고 할 때 그 ‘무엇’입니다. 프로이트는 겉모양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펜은 남성을 상징한다’라는 식으로 상징된 것을 추적해 갑니다. 바로 이 관계를 “[…]분석적으로[…]”. 이때 ‘분석적’은 ‘정신분석적’의 약칭입니다. “[…]착상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종종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 둘의 관계, 충동과 징후, 상징과 상징된 것의 관계가 인과, 이해, 표현 관계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너무 이론적인 의문이에요. 프로이트적인 틀, 가령 충동과 징후의 관계에 사로잡히게 되면, “생산이라는 본래의 유일한 관계”가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깐 정신분석학을 칭송합니다. 원서 31쪽 위쪽입니다. “정신 분석의 위대한 발견은 욕망적 생산, 무의식의 생산들의 발견이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와 더불어 이 발견은 하나의 새로운 관념론에 의해 금세 은폐되었다. 즉 공장으로서의 무의식은 고대 극장으로 대체되었고, 무의식의 생산 단위들은 재현으로 대체되었고, 생산적 무의식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인 무의식(신화, 비극, 꿈……)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이 네 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첫 시간 시작할 때, 들뢰즈·과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제시한 무의식 이론이 어떤 특징을 가질까 말씀드렸는데, 이 부분과 관련됩니다. 생산하는 것이 무의식의 진정한 활동들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생산하는 것과 생산된 것은 같은 거예요. 계속 순환을 거듭합니다.

생산 과정으로서의 과정

다음 문제로 가면요. 분열증의 문제를 자아의 문제로 가져갈 때 사라지게 되는 것, 놓치게 되는 것이 뭔지 얘기합니다. 다시 맑스를 원용합니다. 유명한 구절이죠. “밀의 맛에서 누가 그것을 재배했는지 알아맞힐 수 없고, 생산물에서 생산 체제와 생산관계들을 알아맞힐 수 없다.” 결과를 보고 그것의 참된 원인을 알아맞힐 수 없다는 거죠. 이 밀의 맛이 좋은데, 누가 재배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휴대전화가 있다고 쳐요. 이건 특정한 생산 체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죠. 왜냐면 기술 발전의 정도가 이 안에 함축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다른 좀 더 단순한 사물을 생각해 보면, 어떤 사회 체제에서 만들어졌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생산물을 그것이 의존하는 현실적 생산의 경과가 아니라 인과나 이해나 표현이라는 관념적 형식들에 관련시킬수록, 그만큼 그것은 특유하게, 말할 수 없이 특유하게 보인다.”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것을 낳은, 동시에 존재하는 수많은 결과물, 생산물도 함께 고려되고, 그것 모두가 특정한 현실적 생산의 경과 속에서 생산되었다는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분열자의 경우도 가령 로런스(D. H. Lawrence)가 《아론의 지팡이(Aaron’s Rod)》에서 묘사한 것처럼 “정신과 육체가 끝내 파멸해버리는 어떤 끔찍한 극단”이라는 식으로 과정을 왜곡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특유한 인물로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생산의 물질적 과정을 설정하자마자 생산물의 특유성은 사라지고, 동시에 또 하나의 <완성> 가능성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분령증은 질병이기에 앞서 “욕망과 욕망 기계들의 생산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과정이 정지하면 병원에 갇힌 임상실체로서의 분열증 환자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분열증은 더 큰 역사적 사회적 물질적 경과의 일부입니다. 그게 일차적이고, 그것의 특정한 조건에서의 결과물이 병원에 있는 자폐증 환자라는 거죠. 그래서 자아에서 시작하면 결국 자폐증 환자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와 사회와 물질 세계 전체를 고려하면 전 과정이 분열증적 과정(schizophrenic process)입니다. 특정 국면에서 이 과정이 느닷없이 정지하는 지점에 있는 게 분열증이고요. 세계 전체를 한꺼번에 고려하느냐, 아니면 특정한 지점만 주목하느냐의 차이지요.

4장 1절의 끝에 있는 그림을 다시 보기 바랍니다(원서 336쪽).

이 그림에서 왼쪽 상단에서 비스듬하게 오른쪽 아래로 진행하는 선이 우주의 경과, 생산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각각 토지의 몸, 전제군주의 몸, 돈-자본의 몸을 거쳐 이것들의 보편적 형태인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을 경유해 진행합니다.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은 1장 2절의 주제였지요. 토지, 전제군주, 돈-자본은 3장에서 자세히 다루게 됩니다. 지금 설명하는 대목은 왼쪽의 마지막 세 부분입니다. 탈영토화의 분열증적 과정은 욕망 기계의 작동, 즉 생산의 과정의 첫째 종합인 생산의 생산인데, 그것이 기관 없는 충만한 몸, 즉 생산의 과정의 둘째 종합인 등록의 생산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다시 탈영토화의 분열증적 과정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갑자기 멈추면 임상 존재로서의 분열증이 되고 맙니다. 병원에서 목격하는 분열증 환자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따라서 들뢰즈·과타리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과정의 완성을 주장합니다. 이것이 돌파(breakthrough)로서의 분열증이고, 4장에서 다뤄질 내용입니다.

그래서 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행하는지, 이 이행은 불가피한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의 흐름으로서의 분열증적 과정은 왜 병원에 가야만 하는 환자로 축소되는 걸까요?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중요한 지적을 했다고 논평합니다. 야스퍼스가 활동했던 시기가 대략 20세기 전반기입니다. 그런데 철학자 야스퍼스가 왜 정신병 얘기를 했을까요? 몇 번 말씀드린 적 있는데, 정신의학 자체가 19세기에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야스퍼스는 정신의학 논의에서 초반기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학자입니다. 1913년에 《정신병리학 총론(Allgemeine Psychopathologie. Ein Leitfaden für Studierende, Ärzte und Psychologen)》을 출판했고요.

정신병이라고 하면 20세기 사고방식으로는 정신과 의사가 다루는 영역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19세기까지만 해도 정신병이 뭔지도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았고, 임상 실천으로서의 정신의학도 막 태동하던 중이었고, 또 심지어 프로이트처럼 정신분석이 정신의학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되기도 했어요. 증상이나 현상에 대한 분석과 치료 실천이 막 만들어지고 결합하던 시기가 19세기였어요. 정신분석도 일부를 쟁취한 거죠. 또 다른 각도에서 정신의학과 관련된 몇몇 정신 현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이건 내 분야다’라고 선언한 거예요. 이른바 ‘나와바리’ 싸움, 영역 싸움의 결과로 정신의학도 탄생했고 정신분석도 탄생했어요.

굉장히 중요한 점이고, 들뢰즈·과타리도 그 부분을 강조해요. 정신병이라는 현상 자체가 단순하고 단일한, 하나로 통일될 수 있는 현상들의 집합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게 역사적으로 정리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분류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그 체계도 시대에 따라 계속 달라져왔습니다. 아직 정신의학에 관해 합의된 결론이 없다는 것을 짚고 가야겠습니다. 오늘날 진단의 표준으로 사용되는 것이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인데, 1952년에 처음 나와 2022년에 최신 5판까지 개정되었습니다. 정신의학의 교과서라고 봐도 됩니다. 판이 개정될 때마다 ‘진보’가 있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저 표준에 대해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어요. 얼마간의 약물 치료, 유전 치료가 효능이 있다고 일부 확인됩니다만, 오늘날까지도 전반적인 원인과 전적인 치료 부분에 관해서는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특히 앞에서 본 아르브뤼 같은 예술 영역과 정신질환의 관계, 예술적인 천재성과 조울증의 관계 같은 것은 여전히 논란거리입니다. 들뢰즈·과타리는 미국 중심의 정신의학과는 다른 접근을 통해 분열증 문제를 이해하려고 한다고 보면 됩니다.

조금 더 봅니다. 야스퍼스가 공헌한 바가 뭐냐? 밑에서 다섯째 줄 보시면요. 과정이라는 개념을 인성(人性), personality와 관련짓지 않고, 오히려 대립시켰습니다. 보통 정신병은 인성 혹은 자아의 문제와 관련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그것과 관련 없고 어떤 ‘단절, 침입’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야스퍼스는 과정을 “자연 속에 있는 <악령>과의 관계”라고 보았습니다. 표현이 모호하죠. 악령, 악마적인 것과의 관계라. 자연 속에 있는 악령은 자연적인(physical, natural) 게 아닙니다. 악령은 네이쳐(nature), 피시스(physis), 이런 자연의 영역 너머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metaphysical)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과정을 형이상학적인 뭔가와의 관계라고 봤다는 거죠. 자아가 관건이 아니라, 악령과 관련된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이것만 해도 되게 큰 발전인 것이, 자아를 중심으로 이것의 고장이라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 더 정확히는 세계를 넘어선 곳에 위치하고 있는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봄으로써 지평을 넓힌 거죠. 그런 점을 들뢰즈·과타리가 평가하는 겁니다. 단지 그에게 결핍되어 있던 것이 뭐냐면, 과정을 자연 속에 있는 악령과의 관계 대신 ‘경제적·물질적 현실’로 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자연=산업, 자연=역사의 동일성 속에 있는 생산과정’으로 착상하지 못했다는 게 한계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정신의학자들이 갖고 있던 자아중심주의, 인성중심주의에서 한참 탈피했다는 것이 의의입니다. 나중에 4절 끝에서, 원서 43쪽에서, 과정이라는 게 두 양상을 지니고 있으며, 그 중 하나가 악령과 만나는 지점이라고 언급합니다. 이 대목이 지금 살펴본 야스퍼스와의 관계를 언급하는 거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때 가서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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