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봇 인공지능(GPT, Claude, Gemini 등 편의상 ‘챗봇’으로 약칭)은 글을 쓰는가? 이 물음은 챗봇이 글쓰기의 주체일 수 있느냐는 것과 관련되며, 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물론 저자/주체의 죽음 혹은 소멸을 주장한 구조주의 이래의 담론(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에 따르면, 글쓰기 주체를 다시 소환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최소한 저작권 행사자로서 저자가 잔존해 있다면, 저자/주체의 죽음을 외치는 일은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양심적이지 못하다.
챗봇이 등장한 후로 아직 따져 보지 않은 것 중 하나는 챗봇이 생성한 글을 평가하는 능력이다. 환각(hallucination) 혹은 헛소리(bullshit)를 식별해 내는 문제부터 글의 품질을 평가하는 문제까지, 관건은 온통 ‘읽는 능력’, 즉 ‘문해력’의 문제로 수렴한다. 여기서 말하는 문해력은 전통적으로 강조되어 왔던 그 문해력과 그리 다르지 않다.
전통적인 글은 대부분 인간이 썼다. 오늘날 문제는 어떤 글을 접했을 때 그 글을 인간이 썼는지 인공지능이 썼는지 식별하는 일이 아니라 누가 혹은 무엇이 썼건 간에 그 글 자체를 평가하는 일이다. 어찌 보면 글에 대한 더 냉정하고 엄격한 평가 능력이 요청된다. 전에는 글을 인간이 썼다는 전제 아래 글을 대하면서 혹시 모를 배려가 개입할 수도 있었다면, 이제는 글 그 자체에 집중해서 평가하는 것이 의무가 되었다. 글은 필자와의 연관성에서 독립했지만 더 엄정한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챗봇의 등장은 인간에게 더 큰 문해력을 갖도록 촉구한다. 전에도 문해력은 중요했지만, 지금은 평가해야 할 글의 양이 훨씬 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교육 과정에서 문해력을 더 향상시키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문해력 격차가 사회·경제적 격차로 이어질 확률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글 그 자체를 평가하는 능력이 향상되면, 권위 있는 필자의 영향력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어떤 필자는 더 믿음직하다고, 또 어떤 필자는 더는 믿기 어렵다고, 평가가 바뀔 수 있다. 챗봇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인간 사회를 변화시킬지 모른다. 읽고 쓰는 능력의 향상에 교육이 더 초점을 맞추게 된다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말이다.
글쓰기와 문해력에 대한 당연한 이야기를 늘어놓으시네요. 이제는 챗봇을 통해서, 문학과 논문 등의 기초작업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와있습니다. 자꾸 창작의 ‘주체’를 운운하며, ‘인공지능 대 인간’이라는 도식 속에서 각각의 주체성과 창작성에 너무 집착하는 듯 합니다. 이미 인간-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작품들(글,미술,음악,등)이 있습니다. 하이브리드적 양상을 보이는 인공지능’과’에 주목하는 관점이 더욱 필요한듯 합니다.
관련하여 이진경 교수의 대담집 을 추천합니다. 들뢰즈언의 관점에서 잘 분석하고 있는데, 여전히 20년째 열등감으로 이진경 교수에 대한 비난?을 이어가고 있는 김박사로서는 객관적인 평가와 배움이 불가능하겠군요. 앞으로 김박사가 30년간 연구를 해도 이진경 선생의 절반업적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존심과 열등감을 내려두고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문해력부터 기르세요.
역시, 김박사님, 따뜻한 조언 감사합니다. 을 읽으며, 문해력을 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