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020

독신 기계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독신 기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편집증 기계의 밀쳐냄과 기적 기계의 끌어당김의 대립이 계속된다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대립이 계속될 때, 치료적으로 화해하는 국면이 필요하고, 그 국면이 바로 독신 기계의 작동입니다. 그것은 “<억압된 것의 회귀>로 기능하는 새 기계”라고 지칭됩니다. ‘억압된 것의 회귀’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드리죠. 원서 24쪽 맨 위를 봅니다. “프로이트는 더 정확하게 슈레버의 병의 전기, 즉 슈레버가 자신의 여성-생성과 화해하고 자연=생산이라는 동일성(신인류의 생산)으로 […]” 여기서 ‘신인류’는 분열자를 지칭하겠죠. “[…] 그를 다시 데려가는 자기-치유의 과정에 들어가는 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게 치료적인 화해가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이때 슈레버에게 생겨나는 느낌을 가리키기 위해 ‘독신 기계’라는 말을 빌려오자고 하면서, 이렇게 이어갑니다. “주체는 욕망 기계들 곁에서 여분으 로서 생산된다는 말과 주체 자신은 이 제3의 생산 기계 및 이 기계가 행하는 잔여적 화해, 즉 <따라서 이것은 그것이었다(C’était donc ça)!>라는 놀라운 형식을 띤 소비의 결합 종합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결국 같은 얘기다.” 진술은 복잡하지만 지금까지 했던 얘기를 저렇게 요약합니다.

미셀 카루주가 ‘독신 기계’라는 개념을 발명했는데, 몇 가지 사례들을 열거합니다. 이 사례들을 각각 다 설명하기는 어렵고요. 문단 맨 마지막 문장의 “자기 성애적 또는 차라리 자동 장치적이라 할 수있을 쾌락”과 관련해서 ‘독신 기계’라 칭한 것 같습니다.

잠깐 ‘억압된 것의 회귀’에 대해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여기서는 인용부호로 묶여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언급한 개념을 들뢰즈·과타리가 다른 뜻으로 이용한다는 말이죠. 들뢰즈는 반복에서 현행화되지 않고 잠재로 남아 있는 것을 억압된 것이라고 봅니다. 잠재는 다시 현행화될 힘을 갖고 있어서, 다음 순간 현행화되면서 현행화되지 않는 것을 억압합니다. 아이돌 그룹이 군무를 출 때 전면에서 공연하는 멤버와 배경의 멤버들이 나뉠 때 전면으로 나오는 운동을 현행화, 후면으로 돌아가거나 후면에 남는 상태를 잠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돌의 군무는 억압된 것의 회귀라는 형태로 이해해 볼 수도 있습니다.

물질, 그리고 내공들 나는 느낀다

독신 기계가 생산해 내는 건 뭘까요? 번역이 좀 어려운데, 프랑스어로 ‘des quantités intensives’, 영어로 ‘intensive quantities’입니다. 일본어는 ‘강도[내포]량(强度[內包]量)’이라고 아주 어정쩡하게 절충적으로 옮겼습니다. 바로 그걸 독신 기계가 생산해 냅니다. 이건 ‘나는 느낀다’ 혹은 ‘기분’을 가리킵니다.

이 양을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해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B207ff.)에서 ‘펼쳐 있는 크기’와 ‘내공적 크기’를 구별합니다. 먼저 인용문입니다.

“무릇 감각 자체는 아무런 객관적 표상도 아니고 감각 안에서는 공간의 직관도 시간의 직관도 발견되지 않으므로, 감각은 연장적 크기를 갖지 않지만, 여전히 어떤 크기를 가지며, ― 말하자면, 경험적 의식이 어떤 시점에 무=0에서 일정한 정도까지 증가할 수 있는 감각의 포착을 통해, — 따라서 내공적 크기를 가지며, 이에 대응해 지각의 모든 객체들에는, 이 객체들이 감각을 담고 있는 한, 내공적 크기가, 즉 감관에 미치는 영향의 도[度]가 부여되어야만 한다.”(Kant 2006: B208)

칸트는 서로 쪼갤 수 있고 그래서 부분들로 나눌 수 있고 합칠 수 있는 양을 ‘펼쳐 있는 크기’(혹은 통상의 번역으로 ‘연장적 크기’)라고 합니다. 독일어로 ‘extensive Groß’, 영어로 ‘extensive quantity’입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양이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이런 양 말고도 안에 바깥으로가 아닌 안에, 담긴 양도 있습니다. 바깥으로 펼쳐 있지는 않지만 안에서 크기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칸트의 표현으로 ‘무=0에서 일정한 정도까지 증가할 수 있는’ 양이 감각에 포착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펼쳐 있지 않은 이 양, ‘intensive’로 지칭되는 양입니다. 이게 번역이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일본어 번역도 저렇게 꼼수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백종현 교수는 이걸 ‘밀도’라고 번역했고, 그 전의 최재희 교수는 일본 학자들과 비슷하게 ‘내포’라고 번역했습니다. 다 쉽지 않은 개념입니다. 그런데 물리학에서 질량을 부피로 나눈 값이 밀도죠. 그런 점에서 백교수의 번역은 적절치 않습니다. 백교수는 내밀하다는 뜻으로 밀도라는 말을 썼던 것 같은데, 오해를 낳는 번역어입니다. 일본에서 번역한 ‘내포’라는 말은 너무 논리학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김상환 교수의 경우에는 ‘강도’라고 번역합니다. 이 번역은 물리적 강도라고 했을 때의 ‘세기’라는 뜻까지 포괄하게 됩니다.

다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들뢰즈 혹은 들뢰즈·과타리가 이 개념을 설명하고 예시하는 맥락에 맞게 옮기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두 가지 유념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이 개념은 ‘펼쳐 있음’ 혹은 ‘연장’에 대립한다는 점입니다. 서양근대철학 전통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건 가장 넓은 의미에서 ‘생각’의 영역입니다. 데카르트가 말한 ‘레스 코기탄스(res cogitans)’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우주에서 생각하는 존재는 인간이 대표적입니다. 다른 비인간 존재가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고, 최소한 생각이 서로 전달되거나 교환될 수도 없습니다. 들뢰즈·과타리는 이와 관련해서 ‘나는 느낀다’ 혹은 ‘기분’을 제시합니다. 들뢰즈·과타리가 칸트가 제시한 ‘내적 느낌’을 예로 들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합니다. 번역어는 이 두 가지 사항, ‘펼쳐 있지 않고 내적으로 있다’는 점과 ‘생각 혹은 느낌이다’라는 점과 관련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강도’, ‘내포’, ‘밀도’ 같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런 말들은 물리학이나 논리학에나 적합하지, 심리학에서 쓰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내공(內功’이라는 말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내’는 ‘안’을, ‘공’은 ‘힘’을 가리킵니다. 무협지 냄새가 난다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맥락에서는 어울리기도 하고, 어떤 맥락에서 봤을 때는 안 어울리기도 하더군요. 나의 학위논문에서 ‘강도’라고 한 건 학계와 약간 타협을 본 겁니아. 데카르트는 생각 혹은 마음의 특성으로 쪼개질 수 없다는 점을 듭니다. 펼쳐 있는 것 혹은 ‘레스 엑스텐사(res extensa)’는 부분으로 쪼개지는 반면, 마음은 상상하고 욕망하고 부정하고 감각하는 등 여러 작용을 하되 쪼개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정신’이 하는 활동이지, 정신 자체가 나눠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찰》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봤을 때, 나눠지지 않고 나눠지고. 이거 굉장히 중요한 대비라고 할 수 있는 데요. 여기서는 칸트가 주목한 사태도 그 맥락이고요. 무=0에서 일정한 정도까지 증감한다는 것이지요. 들뢰즈·과타리가 얘기하는 부분도 거의 그 맥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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