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관점에서 본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진화 (1회) : 인공지능은 인간을 망친다

(연재 중인 글 ‘전자책은 책이 아니라, 책의 일그러진 비유일 뿐이다’를 잠시 우회하면서)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진화를 살펴보자.

공진화한 생물 집단이 진화하면 이와 관련된 생물 집단도 진화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생물 집단 간의 관계뿐 아니라 한 생물 집단과 무생물을 포함한 다른 집단의 관계에서도 공진화를 언급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간과 기술 기계의 관계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말처럼, “우리는 건물을 짓는다. 그다음에는 건물이 우리를 짓는다(We shape our buildings and then they shape us).” 이 경우 우리와 건물의 관계가 바로 공진화다.

지금 고려하고 있는 두 집단은 ‘인간’과 ‘인공지능’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인공일반지능 혹은 초지능의 문제는 당장 답을 찾기 어렵다. 개념의 정의부터, 구현 과정과 경로, 시기 등 모든 문제에서 합의가 난망하다. 나 나름으로는 생각이 있지만, 이를 고집하기보다 우회로를 통해 이 문제를 전망해 보면 어떨까 한다. 여기서 우회로란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진화가 어떻게 일어날지 그림을 그려보는 일이다.

진화는 우주를 관장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다. 이에 맞먹는 건 아마도 엔트로피 법칙 정도가 있을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이, ‘우주는 쓸모없는 것들이 늘어나면서 서서히 죽어간다‘는 열죽음을 말한다면, 진화는 ‘특정 시점(時點)에서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어떤 개체군을 둘러싼 환경의 압력을 견디는 개체군만 존재한다‘는 원리로 요약된다. ‘변이’와 ‘선택’은 이 대명제를 설명하기 위한 현상이며, 진화를 무생물 세계로 확장하면 더 중요한 것은 ‘역인과(reverse causation)’이다(니체, 베르그손, 들뢰즈를 경유해 내가 만든 이 개념은 다른 자리에서 논하겠다. 요점은 현재가 과거를 리메이크 혹은 리모델링하는 방식으로 현재 안에 우주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존재론 원리다). 이 문단의 내용에 시비가 많겠지만, 반론을 하겠다면 생각을 깊이 한 후에 했으면 싶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 활동의 일부를 대신해 준다. 바둑 두고, 길 찾고, 번역하고, 문장이나 그림을 생성하는 등의 활동이 그 예다. 나는 인공지능이 글을 요약하고 예술 작품을 창작한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본다. 요약하는 척하고(틀린 내용도 많으니까) 창작하는 척하는(인간 작가와 달리 결정 장애니까) 것까지는 맞지만, 인간이 요약하고 창작하는 데 보조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 정도만 인정할 수 있다. 이런 논란이 있을지라도, 인공지능이 지능 활동의 일부를 대신해 주는 건 분명하다. 계산기나 엑셀이 오류를 범하지 않을 거라는 정도의 믿음을 인공지능(딥러닝 유형)에 대해 갖는다면, 조금 망설여야 하겠지만.

인공지능이 지능 활동을 대신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단순한 지능 작업은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인간은 다른 혹은 더 복잡한 지능 작업에 매진할까? 우선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는 데서 출발하자. 전자 계산기가 등장했을 때, 그것을 사용하면 계산 능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수학 수업에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계산기를 쓰면 계산 능력이 떨어지는 건 분명하다. 계산은 고도의 집중력과 연속 기억을 요구한다. 해(solution)에 대한 직관과 거기 도달하기 위해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안 되는 연속 집중이 계산 과정이다. 계산기는 그런 생각 활동을 유예한다. 그런데 생각 활동은 운동과 유사하다. 게을리하거나 자주 멈추면 능력이 퇴화한다. 요컨대 생각 활동은 반복된 훈련을 통해서만 현상 유지하거나 탄탄해진다.

그렇다면 공대생이 공학 계산기를 허락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대생도 계산기를 쓰면 계산 역량이 퇴화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계산기를 쓰는 시간에 다른 고도의 정신 작업을 수행한다. 이로써 공대생은 손으로 하는 계산이라는 생각 활동은 멈추지만 그 대신 더 큰 그림을 그려가는 생각 활동, 대개 계산보다 훨씬 어려운 생각 활동을 한다. 따라서 공대생이 계산기를 쓰는 것과 고등학생이 계산기를 쓰는 건 겉보기에만 유사할 뿐 전혀 다른 활동이다. 공대생의 이런 대리보충(supplément) 관계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면 초중고생에게 계산기를 쓰게 하면서 공대생의 대리보충 관계가 일어나게 할 수는 없을까? 집중력과 연속 기억 능력을 키워주는 또 다른 효과적인 교육적 수단이 있을 수는 있지만, 계산이 수리적·논리적 사고를 훈련시키는 검증된 가장 좋은 수단이라는 점을 보면 계산 대신 다른 수단을 채택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계산에 일치하는 다른 훈련 수단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끝으로 공대생은 이미 꽤 오른 계산 훈련을 통해 일정한 경지에 이른 상태다. 따라서 초중고생이 계산기를 쓰면서 다른 사고 훈련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인공지능으로 돌아오자. 인공지능이 고도화되면서, 인간이 인공지능을 쓰는 것은 초중고생이 계산기를 쓰는 일과 비슷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인공지능에게 일을 시키면서 그와 동시에 인공지능을 통해 수행하는 일 수준의 생각 훈련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서 앞으로 일어나게 될 장면은, 대부분의 인간이 생각 훈련을 지금보다 훨씬 덜하게 되고, 평균 지능의 절댓값이 떨어지는 한편, 극소수 인간은 고도의 생각 능력으로 인공지능을 더 발전시켜, 인간 대부분은 지능적으로 퇴화하고 인공지능의 지능적 기능은 향상되는, 그런 공진화 회로의 연쇄에 돌입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데는 불과 몇 세대로 충분하다.

말이 좋아 그렇지, 인공지능이 일을 대신해 주면 그 시간에 인간이 다른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건 망상이다. 영화 <WALL-E>는 이를 잘 보여준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소수의 인간이 창의적인 일을 해서 인류의 수준을 높였고, 대부분의 인간은 늘 형편없었다는 반론도 있다. 일면 사실일 수 있지만, 근래의 보통 교육의 확산이 얼마나 많은 문화적·문명적 진보를 낳았는지는 꼭 짚고 가야 한다. 신분제 타파, 양성평등, 민주화, 복지, 포용, 배려 등의 가치는 교육 받은, 즉 계몽된 다수 인구가 없었다면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진화 과정에서 예상되는 측면은, 보통 교육에서 실행했던 사고 훈련이 전반적으로 후퇴하는 장면이다. 굳이 왜 그걸 배워야 하고 훈련해야 하는데? 이런 반지성이 다수 의견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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