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에 아르토의 구절이 나옵니다. “난 아버질 믿지 않아 / 어머니도 / 난 / 엄마-아빠 게 아냐”.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아르토의 이 이야기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뭐예요. 나는 엄마도 아빠도 믿지 않고, 어머니, 아버지 것이 아니다. 즉, 몇 줄 아래 나오는 ‘부모가 있는 생산(une production parentale; a parental production)’을 부정하는 거예요. 엄마, 아빠, 나로 구성된 자본주의 부르주아 핵가족 구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건 정신분석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가 나를 낳은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생물학적으로는 엄마, 아빠가 낳았겠지만, 사회적으로는 핵가족 삼각형 안에 갇혀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게 부모가 있는 생산을 부정한다는 뜻이에요.
그게 어떤 국면에서 두드러지냐. 바로 기관 없는 몸의 국면에서 그렇습니다. 문단 시작하는 부분부터 보겠습니다. “욕망적 생산은 이항-선형 체계를 형성한다. 충만한 몸은 그 계열에서 제3항으로 도입되지만, 그 계열의 2, 1, 2, 1……이라는 성격을 부수지 않는다.” 2는 생산하기와 생산물이 분리된 계기이고, 1은 동일성의 계기입니다. 계속 가는 거죠. “그 계열은 자신을 오이디푸스 같은 전형적인 3항 삼각형 형태에 집어넣고 주조하려는 베끼기〔轉寫〕에 전적으로 저항한다.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은 반생산으로서 생산된다.” 반생산도 생산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부모가 있는 생산을 함축하는 모든 삼각형화의 시도를 거부하기 위해서만 반생산으로서 개입한다.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은 그것의 자기-생산, 자신에 의한 그것의 발생을 증언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부모에 의해 생산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기관 없는 몸은 ‘자기-생산(auto-production)’이기 때문에 ‘부모가 있는 생산’일 수 없다는 겁니다. 자기-생산은 자기가 자기를 생산했다, 자기를 낳았다는 말이죠. 그 자체로 모숩입니다. 내가 아직 없는데 어떻게 내가 나를 낳겠어요? 내가 이미 있다면 내가 낳는 건 내가 아닐 테고요. 따라서 이 표현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단 한 문장 건너뛰어서 계속 보겠습니다. “그래, 나는 내 아버지였고 나는 내 아들이었다. <나, 앙토냉 아르토, 나는 내 아들 이고 내 아버지이고 내 어머니이고 또 나다.>” 이렇게 부모 자식 관계의 동일성을 얘기합니다. ‘나 = 내 아버지’, ‘나 = 내 아들’이라는 겁니다. 이상의 <오감도> 시 제2호가 생각나지요? 시 전문은 이렇습니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느냐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한 번 비교해 보시고요.
여기서의 동일성은 해석이 좀 필요합니다. 앞서 말했듯, 생물학적 재생산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건은 ‘우주’라는 단위를 염두에 둘 때의 재생산입니다. 아르토의 ‘나’를 ‘우주’로 바꿔보세요. 우주는 항상 자기 자신을 생산하죠. 생산의 경과를 이어갑니다. 아르토의 ‘나’에 해당하는 유일하게 실질적인 존재는 전체로서의 우주, 전체로서의 세계, 스피노자식의 자연 전체, 현실의 총체밖에 없습니다. 이것만이 자기가 동시에 자기 자식이자 자기 아버지-어머니일 수 있어요.
그러면 분열자는 뭐냐? 우주의 운행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분열자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앙토냉 아르또라는 자식을 낳은 부모를 부정하는 후레자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핵심이 되는 건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몸소 현현한 우주가 앙또냉 아르또입니다. 우주가 작은 분신을 통해 발언하고 있습니다. 아르토의 시구절은 우주의 목소리입니다. 부모에 의해서 생산된 것이 아닌 자기-생산. 나는 내 아버지고, 내 어머니고 내 자식이라는 선언. 그리고 기관 없는 몸. 자기가 자기를 낳은 기관 없는 몸. 뒤에 가면 ‘고아’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고아인 무의식. 이 개념들이 다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3절. 주체와 향유
셋째 종합: 결합 종합 또는 소비의 생산
따라서 그것은 …이다
3절로 갑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결합 종합’ 혹은 ‘소비의 생산’입니다. 먼저 용어부터 보고 가겠습니다.
‘결합’으로 옮긴 말은 프랑스어 ‘콩종시옹(conjonction)’입니다. 영어로 ‘conjunction’, 일본어로는 ‘연접(連接)’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그것은 …이다(c’est donc …)’라는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소비의 생산’이라고 표현됩니다. 여기서 ‘소비’는 프랑스어로 ‘콩소마시옹(consommation)’인데,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경제적 의미에서 ‘생산’, ‘분배’와 구분되는 ‘소비’이기도 하지만 ‘완성’, ‘완수’라는 뜻도 있습니다. 정점에 이른다는 뜻이에요. 가령, 하나의 사이클을 생각할 때, 한 바퀴 돌아 원이 딱 완결되는 거를 뜻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영어로 ‘consumption’과 ‘consummation’ 두 뜻이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생산의 경과, 생산의 운행을 논리적으로 셋으로 구별합니다. 넓은 의미의 ‘생산’은 사실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생산의 생산, 등록의 생산, 소비의 생산, 이렇게 논리적으로 구분하는 거죠. 있는데. ‘결합 종합’, ‘소비의 생산’은 마지막 종합입니다. 그래서 종합이 완결된다는 점에서 ‘콩종시옹’을 ‘결합’이라고 옮겼는데, 이 말도 번역이 제각각이에요. 아까 보았듯, 일본에서는 ‘연접’이라고 옮겼죠. 한국에서도 ‘연언(連言)’이나 ‘통접(通接)’이라고 옮기기도 합니다. 문법에서는 ‘접속사’를 지칭합니다. 두 문장을 이어주는 기능을 합니다.
요약하면, 《안티 오이디푸스》 번역에서는 connection, disjunction, conjunction을 각각 ‘연결’, ‘분리’, ‘결합’으로, 이와 관련된 종합은 ‘연결 종합’, ‘분리 종합’, ‘결합 종합’으로 옮겼으니, 일단 용어 사용의 일관성을 견지하면서 따라오기 바랍니다.
생산의 세 종합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 경과를 관념적으로 멈춰볼 수 있습니다. 그걸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거죠. 진행되다 멈추다 다시 진행될 때의 세 국면이 보입니다. 멈춤의 순간에 ‘잔여물’이 하나 생깁니다. 잔여물 하나가 뚝 떨어져 나옵니다. 복잡하겠지만 그것을 여기다가 표시할 수 있습니다[[그림 참조]]. 생산의 경과의 첫 번째 계기인 욕망 기계, 두 번째 계기인 기관 없는 몸, 그 사이에서 뭔가가 생겨납니다. 생산, 등록, 소비 혹은 완결입니다. 이게 한 사이클이고, 동시에 일어나는 거죠. 원서 22쪽의 맨 아래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큰 틀을 염두에 두고 본문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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