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니체, ‘거짓의 역량?’, 아니, ‘가짜의 역량’”이라는 글에 정대훈 교수가 다음과 같은 논평을 보탰다. 토론은 언제나 환영할 일이다. “‘가짜’도 좋은 번역어지만 ‘거짓’도 원의에 충실한 면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가짜’든 ‘거짓’이든 존재론적이면서도 인식론적인 준거점인 ‘진짜’ 혹은 ‘참/진실’을 상정한 채 하위의 혹은 가치 없는 것을 나타내지만, 니체와 들뢰즈는 ‘가짜’ 혹은 ‘거짓’이 더이상 이러한 위계질서에 종속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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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독재자
철학 연구자들의 기만에 속지 않는 법
철학 연구자들의 기만에 속지 않는 법. 첫째, “변증법적 통일” 얘기 나오면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자기도 모른다는, 뭘 말하고 있는지도 뭘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아무 생각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둘째, 뭘 좀 물어보면 “이게 철학이라서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또는 “철학사를 깊게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텐데” 하며 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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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니체, ‘거짓의 역량’? 아니, ‘가짜의 역량’
들뢰즈의 《시네마2. 시간-이미지》의 6장은 ‘Les puissances du faux’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영어로는 ‘The powers of the false’라고 옮겨져 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거짓의 역량’으로 옮겼고, 이 때문인지 국내의 연구자는 모두 ‘거짓의 역량’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류다(역자 이정하 선배께 미안하게도). 일단 이 표현이 니체의 것이라는 점에서 시작하자. 들뢰즈는 이 점을 명시한다. 그렇다면 니체한테 the fal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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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앞 시대로 돌아가야 할 이유
서양철학 저술들을 읽는 데 있어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은 단언컨대 칸트이다. 물론 칸트(1724~1804)의 어휘가 라이프니츠(1646~1716) 및 볼프(1679∼1754)를 거치며 정립된 독일어 철학 개념의 영향 아래 구성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성립된 독일관념론의 어휘가 일본어로 번역되어 조선/한국에 소개된 이래, 칸트가 빚은 개념 렌즈는 오히려 장벽으로 서게 되었다. 심지어 라이프니츠-볼프 그리고 바움가르텐을 읽는 데도 방해가 될 정도니 말이다. 고싱가 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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