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등록의 분리 종합은 생산의 연결 종합들을 다시 덮기에 이른다. 생산과정으로서의 과정은 기입 절차로서의 절차 속으로 연장된다.” ‘다시 덮는다’는 말은 생산의 연결 종합이, 그러니까 계속 일이 진행된다는 겁니다. 아까 베케트의 인물을 봤죠. 말과 발 사이에서 일이 계속되는데, 그 하나하나가 멈춤이죠. 이 멈춤들이 여기서 말하는 등록의 분리 종합입니다. 이 멈춤들이 계속 생산의 연결 종합들로 이어지면서 계속 잘라내는 거죠. 영화에서 컷 하듯이, ‘컷…, 계속…’ 해나가면서, 결국 생산과정의 과정이 기입 절차로서의 절차 속으로 연장됩니다.
또는 리비도(libido)가 생산의 생산을 가동하는 에너지라면, 다른 파생된 에너지 또는 변형된 에너지가 등록에 개입하게 됩니다. 그 에너지를 ‘누멘(Numen)’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누멘은 종교적인 용어예요. 신성한 힘, 신적인 에너지를 뜻합니다. 에너지가 일부 나와서 그게 등록 에너지로 변형된다고 했는데, 왜 그걸 누멘이라고 부를까요? ‘기관 없는 몸’이 신 또는 신적인 거여서 그런지 묻습니다. 그건 아니라는 거고요.
문단 맨 밑의 네 줄을 보겠습니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하고 묻는 사람에게 우리는 정확히 칸트 내지 슈레버 방식으로 이렇게 답해야 한다. 물론 믿습니다만, 단지 분리〔選言的〕삼단논법의 대가(大家)로서, 이 삼단논법의 선험적 원리로서 믿을 뿐입니다(신은 현실의 총체로 정의되며, 파생된 현실들은 모두 이것의 나눔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현실의 총체(Omnitudo realitatis)’라는 말은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나의 논문(“들뢰즈와 과타리의 분리 종합 이론”)에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꼭 참고하세요.
우선 신은 현실의 총체로 이해되고, 현실은 모두 이것의 나눔에서 생겨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눔’에 대한 이해 방식이 칸트와 슈레버에서 서로 다릅니다. 칸트는 나눔이 서로 배타적으로 일어난다고 봅니다. 가령 파이가 한 판 있습니다. 이 파이를 나누면 서로 겹치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각 조각을 각각의 접시에 담을 수 있습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상호 배타탁인 나눔을 ‘배타적 분리’라고 부릅니다. 90쪽 이어진 문단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에게는 신을 선언적 삼단논법의 선험적 원리로 내세우는 칸트의 정의가 중요했다. 모든 것은 하나의 더 큰 현실(현실의 총체)을 제한함으로써 신에서 파생한다고 보는 한에서 말이다. 칸트의 유머가 신을 하나의 삼단논법의 대가로 만들고 있다.” 배타적 분리는 ‘제한’을 통한 나눔입니다. 이걸 ‘칸트의 유머’라고 했습니다. 더 진지한 다른 나눔이 있다는 말입니다.
슈레버는 나눔이 서로 포함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이를 ‘포함적 분리’라고 부릅니다. 이때의 ‘현실(realité)’은 베르그손적인 ‘현행(actuel)’과 ‘잠재(virtuel)’의 합으로 보면 가장 쉽게 이해됩니다(이 주제에 대해서는 들뢰즈의 《베르그손주의》 한글본에 붙인 해설 논문 “들뢰즈의 초기 베르그손주의”를 참고하세요). 현실은 잠재에서 현행으로 운동을 계속하지만, 현행은 다른 현행화 운동에서 잠재로 돌아갑니다. 나눔은 이런 형태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계속 자기 변화를 겪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파생물이다. 이런 뜻으로 보면 이 구절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건 또한 스피노자의 실체, 신, 자연이죠. 파생된 현실들, 즉 스피노자의 유한 양태들은 우주 전체의 나눔이죠. 스피노자가 신이라고 부르는 그 신이 수행하는 자기 생산의 에너지가 유한 양태들 입장에서 볼 때는 누멘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의 총체가 우주가 기관 없는 몸에 위치해 있는 거고, 거기서부터 모든 게 나온다고 하면 해석하면, 그 에너지는 신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는 거죠. 지금 맥락은 그렇게 이해됩니다.
분리 삼단논법, 파생, 나눔 이런 것들은 대략 베르그손 혹은 스피노자의 방식으로 이해하면 됩니. 본래는 생산의 계속인 거죠. 생산을 추동하는 성스럽게 여겨지는 에너지가 갖고 있는 특성이 다음 문단에 나옵니다.
분열증의 계보학
“따라서 성스러운 것은 분리의 에너지가 갖고 있는 성격뿐이다.” 본래 생산을 추동하는 에너지는 리비도입니다. 누멘은 파생적이고요. 그런데 슈레버가 보기에 누멘은 성스럽게, 신적으로 느껴집니다. 사실상 슈레버의 망상에서는 ‘모든 것’이 파생되어 나오거든요. ‘전방의 신의 왕국과 후방의 신의 왕국, 후방의 신의 왕국에서 상위의 신과 하위의 신 등’. 이건 슈레버의 책을 직접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과타리는 프로이트를 잠깐 언급합니더. 프로이트는 슈레버를 분석면서 ‘편집증’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러나 들뢰즈·과타리는 분열증이라고 이해하지요. 프로이트의 진술을 보겠습니다. “<그러한 나눔은 편집증적 정신병들에 아주 특징적인 것이다. 히스테리는 응축시키는 반면 이 정신병들은 나눈다.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 정신병들은 무의식적 상상 속에서 실현된 응축들과 동일시들을 다시 그 요소들로 분해한다.>”(프: 297쪽, 독: 285쪽, 영: 432쪽, 한: 330쪽) 그런데 왜 히스테리가 먼저고, 이런 슈레버적인 편집증이 나중이냐고 들뢰즈·과타리는 묻습니다. 사실은 거꾸로라는 거죠. 생산을 이어가는 (프로이트는 편집증이라고 불렀지만, 실은 분열증이라고 말씀드렸죠) 분열증이 먼저오고, 응축, 정지는 그다음에 온다는 거예요.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의 틀에 가두기 위해 그렇게 말한 거라는 겁니다.
몇 줄 아래입니다. “오이디푸스란, 그것을 사방으로 빠져나가는 계보학적 질료 및 형식을 사회적 재생산이 길들이기로 작정한 이상, 사회적 재생산의 요구 내지 결과가 아닐까?” 여기서는 분열자인 몰로이의 예를 듭니다. 베케트의 《몰로이》의 주인공이죠. 분열자는 본디 호모 나투라, 즉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존재여요. 하지만 사회적 코드들의 이름으로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틀을 강요당하는 거죠. 대화를 보면 아주 재밌어요. “<당신 이름은 몰로이예요, 경찰이 말한다. 예, 금방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말한다. 당신 어머니는? 경찰이 묻는다. 나는 답하지 못했다. 그녀 이름도 몰로이입니까? 경찰이 묻는다. 예, 내가 말한다. 그녀 이름이 몰로이인가요? 내가 말한다. 그래요, 경찰이 말한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당신 이름은 몰로이지요, 경찰이 말한다. 예, 나는 말한다. 그러면 당신 어머니 이름도 몰로이지요? 경찰이 말한다. 나는 또 생각에 빠진다.>” 이 대화는 도데체 뭐죠? 몰로이 입장에서는 뭐건 상관없어요. 그런데 경찰이 사회적 코드, 엄마 이름, 나의 이름, 이런 걸로 심문하니까, 하여간 계속 답을 해요. 그렇지만 바로 또 잊어버리고 바로 다음 과정을 계속 진행해 나갑니다. 이번엔 몰로이가 바로 현실의 총체죠.
“분열자는 가끔은 참을 수 없게 되어 자기를 좀 조용히 내버려 둬 달라고 요구한다. 또 가끔은 장난을 일삼기 시작하여 엉뚱한 소리를 보태기도 하며, 그에게 제안된 모델 속에서 자신의 표식들을 다시 끌어들이고 또 안에서 이 모델을 깨부수기도 한다(예, 그분은 제 어머니예요, 그런데 제 어머니는 실은 동정녀 마리아예요).” 자기 멋대로 말하는 거죠. 분열자는 코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언어의 코드에서 벗어나 있기에, 일상적인 의미의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혹은, 다르게 말하면, 모든 말이 다 가능합니다. 원서 30쪽 중간에 이런 인용문이 나옵니다. “<나는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그 말을 쓰지 않을 거야. 그건 너무나 바보 같은 짓이야. 내가 그 말을 알아 들을 때마다 나는 그 말 대신 삼인칭을 쓸 거야. 내가 거기에 대해 생각 한다면 말이야. 그게 저들을 즐겁게 해 주면 말이야. 그건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거야.>” 아주 자기 모순적이죠. ‘나’는 절대로 ‘나’란 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계속 얘기하는 겁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분열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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