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유 또는 끌어당김, 그리고 기적 기계
다음 문단입니다. “기관 없는 몸은 욕망적 생산으로 복귀하며, 그것을 끌어당기고, 그것을 전유한다.” 이 국면이 밀쳐내는 국면과 다른 국면이고, 아까 표현을 빌면, 과정이 재개되는, 모든 것이 재개되는 국면입니다. “이렇게 끌어당기는 기계는 밀쳐 내는 기계의 뒤를 잇고 있으며, 또 뒤를 이을 수 있다. 편집증 기계 다음에 기적(奇蹟) 기계가 뒤를 잇는다.” 기적을 낳는 기계(프: une machine miraculante, 영: a miraculating-machine, 독: eine Wundermaschine)라고 했습니다. 죽었던 게 살아왔으니까 기적을 낳는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슈레버 책에도 이런 기적을 낳는다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쓴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 다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에>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둘은 공존한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순간을 임의로 쪼갠 건데, 쪼갠 것의 앞쪽 출발점에는 편집증 기계가 있고, 뒷쪽에는 다시 시작하는 기적 기계가 작동합니다. 매순간 멈추고 시작하고, 하는 일이 계속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그림을 저런 식으로 그렸죠[[그림 참조]]. 아주 조밀하게 쪼개야 되요. 순간이라는 개념이 참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스냅사진이라고 말했잖아요. 우주의 운행, 이것의 스냅사진이였다면, 이번에는 활동사진으로 생각해보죠. 몇 컷으로 쪼개졌건, 가령 스물 네 컷이라고 생각한다면, 스물 네 컷 하나하나가 순간 각각을 가리킵니다. 우주 전체를 MRI 사진 찍듯이 스냅사진으로 찍는 겁니다. 그 사이, 그 중간은 없다고 가정하는 겁니다. 그런 필름 한 장 한 장면에서 벌어지는 일이, 한쪽 면에서 보면 편집증 기계고, 다른 쪽 면에서 보면 기적 기계인 겁니다. 그래서 ‘다음에’라고 표현했지만 실은 공존하는 거예요. 순간의 전후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적 기계가 바로 작동한다까지 얘기 했고요. 그림에 표시하면, 여기에 대해서는 밀쳐내는 편집증 기계, 다시 재개되는 저기에 대해서 기적 기계, 이렇게 할애할 수 있습니다. 이쪽은 밀쳐내는 국면이고, 저쪽은 끌어당기는 국면입니다. 이때 끌어당긴다는 말은 욕망 기계들을 자기에게 매단다는 뜻이고, 여기서 다시 욕망 기계들의 작용이 이어지겠죠. 자, 다음 국면으로 가겠습니다.
둘째 종합: 분리 종합 또는 등록의 생산 ― …이건 …이건
이제 둘째 종합인 분리 종합 또는 두 번째 생산인 등록의 생산으로 갑니다. 첫 번째 종합은 ‘연결’이었어요. 두 번째 종합은 ‘분리(프: disjonction, 영: disjunction)’입니다. 몇 문장 읽겠습니다. “다만 생산은 자신이 생산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등록되지는 않는다.” 당연한 얘기죠.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등록의 생산의 영역으로 옮겨 간 셈인데, 등록의 생산의 법칙은 생산의 생산의 법칙과는 같지 않다. 생산의 생산의 법칙은 연결 종합 또는 짝짓기였다. 하지만 생산적 연결들이 기계들에서 기관 없는 몸으로 이행할 때(노동에서 자본으로 이행하듯), 그것들은 <자연적인 또는 성스러운 전제>로서의 비생산적 요소와 관련해 하나의 분배를 표현하는 다른 법칙 아래 들어간다고 할 수 있으리라(자본의 분리들).” 자본의 분리들 앞서 잠깐 설명했습니다. 노동에서 자본으로 이행하는 것은 작동하는 기계에서 기관 없는 몸으로 이행하는 국면과 관련됩니다. 자본의 분리들은 이런 겁니다. 자본이 몸 전체라고 했을 때, 어디에 얼마를 투자하건 상관없이 이게 총자본이죠. 총자본의 분배 또는 각각의 분리가 있습니다. 삼성전자건, 현대차건, 포스코건, 자본의 분리들은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뭐가 되었건 상관없어요. 자본의 투자가 어떻게 이뤄지든 상관없다는 거예요.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이윤율이 더 높은 방향으로 계속 자본이 이동하겠죠.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분배건 그때그때의 최선의 분배라고 할 수 있는 거고, 생산이 이뤄지면서 결과들만 남기 때문에 기관 없는 몸 쪽에서는 이렇다 할 선택권 자체가 없습니다. 생산의 경과가 일어나잖아요. 거기서 그냥 한 단면을 쪼갠 거니까, 여기에는 단면의 찍힌 사진들만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관 없는 몸 입장에서는 어째도 상관없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어째도 자기는 관여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라는 거죠. 콩 심고 팥 심고 벼 심고 하는 일들은 기관 없는 몸들, 토지의 몸 스스로가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들뢰즈·과타리 표현으로는 ‘수동적 종합’, 즉 전에 일어났던 일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관 없는 몸은 능동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난 모든 것이 자국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등록’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등록은 회계 장부, 토지장부, 아니면 도서목록을 적어놓는 장부 같은 것에 등록하는 겁니다. 그런데 등록은 장부가 하는 일이 아니죠? 누군가가 하는 일이죠. 등록된 목록은 이미 있는 것들이죠. 결과적인 측면, 생산물의 측면에서 바라본 일이기 때문에 이 안에 등록된 것은 기관 없는 몸 쪽에서 관여할 수 없습니다. 다음 문장을 보면 이해가 갈 겁니다.
“기관 없는 몸 위에는, 새로운 종합들의 그물 전체를 짜서 표면을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하는 수많은 분리 점들처럼 기계들이 매달린다. 분열증적인 <……이건 ……이건>이 <그다음에>와 교대한다. 어떤 임의의 두 기관을 고려하건, 그 둘이 기관 없는 몸에 매달리는 방식은 그 둘 사이의 모든 분리 종합이 미끄러운 표면 위에서 결국 같은 것으로 회귀하는 그런 식이어야 한다. <…… 아니면 ……>이 호환 불가능한 항들 간의 결정적 선택(양자택일)을 표시하려 하는 데 반해, <……이건>은 이전(移轉)되고 미끄러지면서 늘 같은 것으로 회귀하는 차이들 간의 호환 가능 체계를 가리킨다.” 그래서 ‘분리’입니다. 프랑스어로 ‘수아(soit)… 수아(soit)…’, ‘~이건 ~이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입니다. 이와 대립되는 게 ‘… 우비앵(ou bien) …’, ‘~ 아니면 ~’입니다. 이 차이는 영어로 번역하기 까다롭습니다. 우비앵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형태의 접속사 ‘우(ou)’인데, 양 항이 배타적(exclusive)이에요. 하나만 선택할 수 있어. 흑이냐, 백이냐. 영어로는 ‘either … or …’예요. 이것이냐 저것이냐. 본래는 ‘~이건 ~이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의 의미도 없진 않아요. 이걸 ‘포함적’이라고도 해요. 하지만 들뢰즈·과타리는 포함적(inclusive) 용법을 따로 ‘수아(soit)… 수아(soit)…’에 할당하고, 배타적 용법과 구분하려 하는 거예요. 개념을 예리하게 다듬는 거죠.
논리학에서는 문장 혹은 명제가 ‘~ 또는 ~’ 이어지는(종합되는) 걸 ‘선언(選言)’ 혹은 ‘이접(離接)’이라는 어려운 용어로 번역하곤 했습니다. 일본어를 그대로 가져온 거죠. 나의 생각으로는 ‘분리’로 옮겨도 충분한 것 같아요. ‘분리’라는 게 이미 일종의 종합이니까요. 분리한다는 것은 이미 둘 사이의 관계를 전제합니다. 하나의 뭔가 안에서 관련짓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분리도 종합인 거죠. 논문을 쓴 게 있으니 참고하세요(김재인(2023), “들뢰즈와 과타리의 분리 종합 이론”, 비평과이론 28(2)).
‘~이건 ~이건’, 참 이해하기 쉽진 않은데, 어떻게 되건 자신은 별로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이거든 저거든 상관없어요.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게 베케트의 작품입니다. 베케트의 《충분해》라는 작품의 장면입니다. 말하는 입과 걷는 발의 관계가 ‘~이건 ~이건’이 뜻하는 바를 잘 보여줍니다. 들뢰즈·과타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거는, 아마 다른 사례보다 이 사례가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도 들뢰즈·과타리가 탁월하게 분열자로 묘사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인용이 꽤 긴데 직접 읽어보기 바랍니다.
말하는 입과 걷는 발 사이에 아주 미세한 차이들 밖에 없는데, 묘사된 정황을 보면 뭐든 다 상관없다는 거예요. 또 이걸 어떻게 표현을 하고 있냐면. “이렇듯 말론의 소유물들 처럼 가장 보잘것없고 가장 애처로운 자본의 소유자인 분열자는 자신의몸 위에 분리들을 지루하게 열거해 가며, […]” 이 부분이 흥미로워요. “[…] 또 그는 가장 사소한 교체도 새로운 상황에 대한 반응이나 무례한 질문자에 대한 대답이라고 여겨지는 과시용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뭐든 다르다는 거예요. 다른 한편으로는 똑같아요. 더 이상 설명드리면 그렇고, 앞서 인용된 작품의 구절을 계속 머릿속에 담아두면서 생각해보셔요. 조금 더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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