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해상도는 굉장히 낮다

나는 초거대 언어모델(LLM) 인공지능의 추앙자가 ‘언어의 해상도가 굉장히 낮다’는 초보적인 사실을 왜 외면하려 하는지 알 수 없다. 아마 얀 르쿤이 드문 예외일 텐데, 르쿤은 LLM의 한계를 초기부터 지적해왔고 다른 모델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2024.5.22. Financial Times 앞으로 구축해야 할 인공지능 모델은 1. understand the physical world 2. have persistent memory 3. can reason 4. can plan, perhaps hierarchically.

나는 르쿤이 프랑스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곤 했다. 영어권이 아닌, 프랑스 정규교육을 받은, 드문 CS 과학자라는 뜻.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른 르쿤의 통찰은 여기서 온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그의 생각을 지지해 왔고.

아무튼, 언어의 해상도가 굉장히 낮다는 점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고개를 들어 시야에 들어오는 장면을 언어로 기술해 보라. 한 장의 사진에 담긴 내용을 언어로 묘사하자면 수십 쪽 분량이 필요하다. 더욱이 개별 자연어마다 각 어휘와 어휘에 담긴 의미 망이 서로 다르다. 영어의 world는 독일어의 Welt나 프랑스어의 monde, 그리고 한국어의 ‘세계’와 같지 않다. 물론 인간이 체험하는 세계가 상당 부분 겹치기 때문에(이는 몸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문화적 차이를 넘어선 통번역이 이루어지기는 한다. 하지만 외국어를 진지하게 배워 본 번역 불가능한 차이가 있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나처럼 철학을 하는 사람이나 문학 종사자는 이 점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 점에서 언어는 삶의 빈약한 도구다.

그렇다고 해서 ‘개념’을 상대하는 내가 언어를 무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철학자가 하는 중요한 작업 중 하나는 경계를 긋고 분류하는 일이다. 철학자는 비빔밥을 싫어한다는 농이 있다(나는 좋아한다만). 개념의 혼동을 최대한 피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한계를 알아야, 한계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내가 《AI 빅뱅》에서 언어에 집중했고(심지어 LLM은 ‘언어’ 모델임을 숨기지 않는다), 언어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LLM의 한계를 살피려 했던 이유가 그것이다. 게다가 언어는 왜곡된 렌즈이기도 하다. 요컨대 해상도도 낮지만 군데군데 일그러진 안경과도 같다. 왜냐하면 언어에는 인간 상상의 결과물이 듬뿍 들어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과타리는 “해가 뜬다”라는 말을 고찰한 바 있다(《천 개의 고원》 중 ‘리좀’에서). 엄밀히 말하면, 해가 뜨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돌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종종 언어와 사태가 어긋나는 걸 알면서도 말을 즐긴다. 의식이 있다는 뜻이다.

내가 인공지능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인간 승리’로 알아듣는 이들이 가끔 있는데, 그건 결코 아니다. 내 일차적 관심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에 있다. 선결 과제도 많다. 생명, 몸, 병, 감각, 의식, 생각, 운동 등 비교 항목이 많다. 그 중에서 나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고찰해 볼 예정이다. 인간은 왜 불멸을 꿈꿀까? 기계가 죽음을 예감할까?

책 출간 1년이 지난 지금, 내 생각이 다른 단계로 올라왔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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