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 반–생산은 어떻게 생산력들을 전유(專有)하는가
두 번째 국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번역을 미리 나눠드린 까닭은, 읽고서 잘 이해가 안 되거는 부분의 질문을 위해서입니다. 미리 읽어 왔으리라 믿고, 다음 국면으로 갑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추상적으로는 뜬금없이 ‘기관 없는 몸’이라는 것을 도입했습니다. 그러면 이게 현실 세계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얘기하는 것은 욕망적 생산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응하는 대응물 혹은 사회적 생산이 뭐가 있느냐? 특히 기관 없는 몸에 해당하는 대응물 혹은 사회적 생산을 찾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병렬적 측면을 봐야하는데, 실제로 구분되는 두 생산이 따로 있는 건지 아니면 그 둘이 결합되어 있는 건지,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을 내리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몇 줄 내려가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회적 생산의 형식들 역시도 출산되지 않은 비생산적 멈춤, 경과와 짝지어진 반생산의 요소, 사회체라고 규정된 충만한 몸을 포함하고 있다.” 관찰할 수, 확인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회체는 라틴어로 ‘소키우스(socius)’입니다. 원래는 라틴어로는 ‘동반자, 친구’라는 뜻이에요. 그도 그럴 법한 게 ‘사회적(social)’이라는 것도 그런 측면이 있어요. 생산하기와 생산물의 선형 계열의 제3항으로 그 곁에 등장한다는 표현이 나왔었죠. 바로 그 곁에 등장하는 그것이 동반자의 측면입니다. 그것이 사회체입니다.
그 특징이 뭐냐? 그걸 밝혀내는 데 맑스에 의존합니다. 크게 셋을 열거하고 있죠. 토지와 전제군주와 자본. 이게 사회체입니다. 그런데 토지와 전제군주는 자본에서 역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맑스가 본 것은 자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본은 어떻게 사회 속에서 자리잡고 있냐? “그것은 노동의 생산물이 아니며, 외려 노동의 자연적인 또는 성스러운 전제로 나타난다”라는 맑스의 말을 인용하죠? 자본에서 노동과 생산이 발원한다는 겁니다. 자본은 터전, 바탕, 이런 위치에 있고요. 그 위에서 사회적 생산이 벌어진다는 거죠.
몇 줄 더 내려가면. “생산력들과 생산 담당자들은 기적적인 형태로 충만한 몸의 권력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라는 충만한 몸입니다. “이것들은 충만한 몸에 의해 기적을 받은 것 같다.” 자본으로부터 활력, 힘, 에너지를 얻어서 생산력과 생산 담당자들이 일한다는 겁니다. “요컨대 충만한 몸으로서의 사회체는 생산 전체가 자신을 등록하는 하나의 표면을 형성하며, 생산 전체는 그 등록 표면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까 출발점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 위에서 모든 일이 벌어진다, 모든 생산이, 사회적 생산이 일어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입니다. 실제로 자본을 만들어내는 것은 생산력과 노동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다른 강의에서 말했는데, 어떤 돈이 있을 때, 그 돈은 어떤 방식으로 자본이 될 수 있을까요? 돈이 자본이 되기 위해서는 소비수단, 지불수단으로 사용되면 안 됩니다. 그건 그냥 돈이에요. 돈은 맑스가 ‘아버지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들 자본’, 즉 ‘이윤’이라고 부르는 것의 관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처음에 자본이 아들 자본이 돼서, 그 아들과의 비교 속에서 일정한 만큼이 증식되었을 때, 즉 이익이 생겼을 때, 그 때의 것을 자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투자된 돈이에요.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투자된 돈. 이익이 남았을 때, 이 돈을 자본이라고 하죠. 그게 자본에 대한 정의입니다. 자본은 항상 이런 흐름을 통해 생산됩니다. 그것을 플러스 밸류(plus-value), 서플러스 밸류(surplus value), 잉여가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잉여가치’는 번역이 마땅치 않아요. 추가된 가치잖아요. 잉여, 남아도는 것이 아니라 증식된 것, 추가된 거잖아요? 독일어로 ‘메어베르트(Mehrwert)’, 영어로 직역하면 ‘모어 밸류(more value)’예요. 이 추가된 가치를 통해서만, 새로 보태진 자본을 통해서만, 자본은 자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이건 뭐가 만드느냐? 기본적으로 생산활동이 만듭니다. 따라서 자본의 총량은 화폐 중에서 노동을 통해, 생산활동을 통해서 만들어낸 증가분을 처음 투자된 원금에 보탠 집합입니다. 그것이 자본의 전체입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자본에서 생산활동, 생산자(노동자)들이 자본 위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 자체를 만들어낸 게 생산력과 생산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거죠. 자본은 결과물입니다. 그것은 마치 욕망 기계들의 결과물로써 잠깐 멈춘 계기를 가리킬 때 기관 없는 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추상적인 형태로 이야기된 생산의 경과에 관한, 생산의 세 종합에 관한 논의는 사실은 사회 분석에서 유래한 겁니다. 사회분석을 통해서 존재론적인 층위까지 확장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안티 오이디푸스》 1장에서 행해지는 논의가 추상적인 게 아니고 바람직한 의미의 추상, 생산 전체를 관통하는 국면들을 뽑아내는 작업이고, 그래서 존재론을 구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얘기가 쭉 나오는 거예요.
‘등록’은 아직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등록은 별 건 아니예요. 이 전체를 자본으로 보면, 이게 전체 자본의 국면이라면, 여기에 삼성도 있고 현대도 있잖아요. 이 위에 다 분포되어 있죠. 분포 또는 분배, 그런 걸 등록이라고 합니다. 등록 표면에 다 펼쳐 있는 겁니다. 실제로 삼성이랑 현대랑 뭐여도 상관이 없다는 거죠. 뭐건 상관없어요. 어차피 자본 전체의 확장이이뤄지기만 하면 됩니다. 땅에 콩을 심건, 팥을 심건 상관없습니다. 토지의 몸 위에 어떤 것이 자리잡건 상관없는 이치입니다.
처음에는 노동에서 자본이 생겨난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 망각됩니다. 이걸 ‘망상’이라고 불러요. 정확하게 말하면 ‘물신(fetishism)’입니다. 망상 혹은 물신은 본말이 전도되는 겁니다. 사실은 자본이 결과물인데도 불구하고 자본이 발원지처럼 여겨지는 것이 물신입니다. 물신은 사회체 전반을 다 관통해요. 다시 말해, 토지의 몸, 전제군주의 몸, 자본의 몸 할 거 없이 다 관통합니다. 모든 게 토지로부터 태어나고 만들어진다고, 모든 게 전제군주 시스템 위에서 만들어진고, 모든 게 자본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 이 모두가 물신이라는 말로 관통됩니다. 그래서 ‘물신’ 개념은 자본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맑스가 가져온 개념이지만, 들뢰즈·과타리는 이 용어를 확장해서 모든 사회체에 공통된 망상 혹은 허위의식을 가리킵니다.
17쪽 중간의 맑스 《자본》 3권의 인용을 보겠습니다. “<상대적 잉여가치가 자본주의 특유의 체계 속에서 발전하고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이 증대함에 따라, 노동의 생산력들과 사회적 연관들은 생산과정에서 분리되어 노동에서 자본으로 넘어가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자본은 아주 신비한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생산력은 자본의 품 안에서 생기고 또 자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7부 25장이라고 출처가 나옵니다. 또 루이 알튀세르와 제자들이 쓴 《《자본》을 읽자》 중에서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의 주석과(2권 pp. 213ff.)과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의 주석(1권 pp. 201ff.)을 참고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그 과정입니다. 처음에 노동이 자본을 만든다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알고 깨닫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모든 것이 자본에서 생겨나고 자본에 속하는 것처럼 여기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본말이 전도되는데, 그 본말이 전도되는 측면을 ‘기관 없는 몸’이 출발점인 것처럼 느끼는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원래는 욕망 기계들을 기관 없는 몸이 밀쳐내고, 그 밀쳐내는 반작용을 편집증이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마치 펜싱선수의 조끼에 매달린 단추들이 펜싱선수가 왔다갔다함에 따라 흔들리는 것처럼, 이제는 기관 없는 몸 위에 욕망 기계들이 붙어 있는 것처럼 기관 없는 몸이 욕망 기계가 끌어당긴다고 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미세한 순간을 전후로 다른 일이 벌어지는 거죠. 인용 뒷부분이 그 얘기에요. 뒤에 가서는 이런 작용을 ‘기적 기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기적을 낳는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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