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절. 기관 없는 몸
반–생산 ― 밀쳐냄과 편집증 기계
2절로 넘어갑니다. 원서 15쪽, 첫줄에 묘사된 것처럼. “욕망 기계들과 기관 없는 몸 사이에는 명백한 충돌이 일어난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하죠. 한쪽은 작동하는 기계고 한쪽은 그 기계의 고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관 없는 몸의 입장에서 보면, 욕망 기계들의 작용이 마치 애벌레나 기생충처럼 역겹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서너 줄에 걸쳐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제 아르토의 유명한 구절, 들뢰즈·과타리가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를 일본어로 번역한 우노 구니치가 아르토를 주제로 들뢰즈에게서 박사학위를 받았죠. “<몸은 몸이다./ 그것은 혼자며/ 기관이 필요 없다./ 몸은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는 몸의 적이다.>” 지난 시간에 설명했듯, 여기서 몸과 유기체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기관들의 유기적 조직화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관들이 통일성 아래에서 특정한 기능만을 수행한다는 뜻이죠. 눈은 보는 기능, 입은 먹는 기능, 이런 정해진 기능만을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기관 없는 몸은 그런 특정 기능의 참견을 원점으로 돌리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기능이 다 가능해질 수 있는 상태로 되돌아오는 거죠. 1장에 묘사되었던 거식증의 입과 같은 상태로 돌아오는 게 기관 없는 몸의 순간에 포착되는 부분입니다.
몇 줄 내려오면, 그것을 이렇게 대립적으로 표현합니다. 이제부터는, 양이 많을 때는 적절히 건너뛰고 진행하겠습니다. “음성학적으로 명료한 말들[…]”, 이건 분절음들이죠, “[…]에 맞서, 그 몸은 분절되지 않은 블록들인 숨결들과 외침들을 대립시킨다.” 이 숨결과 외침 들이 기관 없는 몸의 측면입니다. 이때 그 둘 사이의 명백한 충돌을 어떻게 표현하냐면…. 다음 문장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른바 본원적 억압이 뜻하는 것은, 일종의 <대체-투자>가 아니라 기관 없는 몸에 의한 욕망 기계들의 이 밀쳐 냄(répulsion)이다. ” ‘본원적 억압’이라는 표현은 정신분석에서 ‘원억압’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프랑스어로 le refoulement dit originaire, 영어로 so-called original repression입니다.
억압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한데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의미는, 나의 박사학위 논문에 적어놓아서 자세히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주로 들뢰즈·과타리의 관점을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것이 무의식의 속에 있다가 의식의 세계에 진입하려면 그것을 막는 작용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억압’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독일어로 페어드랭웅(Verdrängung), 프랑스어로 ‘르풀르망(refoulement)’, 영어로 ‘리프레션(repression)’, 일본어 ‘억압(抑壓)’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계속 거슬러 가다보면, 최초에 어떤 억압이 있다고 상정되어야만 프로이트의 역학적인 측면이 해명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도입한 게 ‘원억압(原抑壓)’이라는 개념입니다. 독일어로 ‘우어페어드랭웅(Urverdrängung)’이라고 했습니다. ‘우어(ur)’는 ‘원(原)’, 즉 ‘원초’, ‘근원’, ‘본원’ 같은 뜻의 접두사죠. 원억압은 가설적으로 도입된 겁니다. 프로이트의 심리 역학 체계가 작동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측면입니다. 실증의 측면이 아니라 이게 없으면 작동되지 않는다는 원리상의 출발점입니다.
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억압은 ‘누른다, 억제한다’는 뜻으로, 두더지 게임에서 못 올라오게 막는 것 같은 겁니다. 들뢰즈·과타리는 억압을 몇 가지 차원으로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우선 프랑스어로 ‘레프레시옹(répression)’이 있습니다. 영어 ‘리프레션(repression)’, 독일어 ‘레프레시온(Repression)’, 일본어 ‘억제(抑制)’입니다. 이건 사회적 수준에서 자행되는 억압입니다. 구별의 편의를 위해 나는 ‘탄압’이라고 옮겼습니다. 일본어로 왜 ‘억제’인지는 잘 납득이 안 갑니다. 영어로는 더 정확하게는 ‘social repression’이라고 옮겼는데, 이런 번역의 문제점은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그다음에 ‘억압’이 있습니다. 프랑스어 ‘르풀르망(refoulement)’, 영어 ‘, 독일어, 일본어 ‘’입니다. 억압은 다시 둘로 구분됩니다. ‘이차적 억압’이 있습니다. 프랑스어 ‘refoulement secondaire’, 영어 ‘secondary repression’입니다. 이걸 ‘고유한 의미의 억압(refoulement proprement dit)’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건 존재론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역학적으로 요청된 층위로, 무의식에서 뭔가가 올라오려고 할 때 검열 같은 형태로 자꾸 억누르는, 실제로 관찰된 층위입니다. 이차적 억압은 ‘원초적 억압’ 혹은 ‘1차적 억압’(originaire, primal)과 대립된다고 해서 ‘이차적’이라고 합니다. 이차적 억압은 심리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하지만 무의식적인 억압입니다. 프로이트의 발견 순서에 따르면, 이차적 억압을 먼저 발견하고 난 후 그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원초적 억압, 본원적 억압’을 도입했습니다. 원초적 억압 또한 더 깊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작동합니다.
억압은 다 무의식 차원에서 작동하고, 탄압만이 사회적인 의식적 차원에서 작동합니다. 그래서 요점을 말하면, 억압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들뢰즈·과타리의 견해입니다. 아시다시피 프로이트는 의식적이고 사회적인 억압을 별로 고려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다 심적 세계에서 일어나고, 그 심적 세계, 정신 세계에서 일어나는 억압은 다 어린 시절과 관련됩니다. 사회적 억압의 측면을 강조하는 게 들뢰즈·과타리의 개입입니다. 그러니까 프로이트에게는 억압이 두 차원, 하나는 심리적 차원, 다른 하나는 그것의 원리적 차원, 두 가지로 언급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무의식 차원입니다.
해석에 있어 들뢰즈·과타리의 중요한 특징은 원억압, 본원적 억압, 원초적 억압을 존재론적인 것으로 상정한다는 점입니다. 프로이트는 여전히 심리 세계에 그 억압을 가두는 반면에, 들뢰즈·과타리는 그것을 생산의 경과 전체와 관련시킵니다. 그러니까 심리적인(psychic) 층위가 아니라 존재론적인(ontological)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로 여긴다는 겁니다.
문제는, 들뢰즈·과타리를 영어로 번역할 때, ‘르풀르망’을 거의 일의적으로 ‘psychic repression(심적 억압)’으로 번역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레프레시옹’은 ‘social repression(사회적 억압)’ 이라고, 앞에 붙이는 형용사만을 달리해서 번역합니다. 그런데 그건 잘못된 번역입니다. 르풀르망의 두 층위가 있고, 하나는 ‘심적’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론적인데, 둘 다 무의식적입니다. 레프레시옹은 ‘사회적’이고 ‘의식적’입니다. 이렇게 셋을 엄밀히 구분해야 들뢰즈·과타리가 읽힙니다. 결국 들뢰즈·과타리에게는 억압에 해당하는 말이 세 층위가 있습니다. 사회적, 존재론적, 심적 층위.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