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011

지난 시간에 슈레버의 책을 소개드렸습니다. 표지에 보면, 프로이트, 벤야민, 라캉, 지젝, 엘리아스 카네티 등이 슈레버의 텍스트를 분석 대상으로 삼아서 연구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현대철학의 전거 중에 하나입니다. 꼭 보시면 좋겠고요.

또 하나 소개시켜드릴 책은 삐에로 클로솝스키(Pierre Klossowski)의 《니체와 악순환》입니다. 오늘 언급될 텐데요. 이 책은 원래 체제가 니체 원문을 독일어로 수록하고 프랑스어로 그걸 번역하면서 해석하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책인데, 몇 장 들춰보니까, 한국어 번역본은 독일어 원본이 지닌 의미를 프랑스어로 해석하면서 의미를 해석하는 요점이 전혀 살아있지 않아요. 아쉽게도 별로 참고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영어본으로라도 한번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Nietzsche and the Vicious Circle》). 니체 연구에 굉장히 중요한 사람입니다. 클로솝스키는 니체의 프랑스어 전집 번역에도 참여하고, 본인이 작가이기도 합니다. 클로솝스키, 꼭 기억해두세요. 《안티 오이디푸스》와의 관련성이 논문으로 나와 있으니 참고하세요(김재인(2023), 들뢰즈와 과타리의 분리 종합 이론, 《비평과이론》 28(2)).

지난 시간 마지막 대목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지난 시간에 생산의 세 가지 종합 중에서 첫 번째 종합인 ‘연결 종합’을 다뤘습니다. 그것을 생산의 세 국면 중에서 ‘생산의 생산’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 작용을 수행하는 존재를 ‘욕망 기계’라고 했습니다. 욕망 기계는 단수형이 아니라 항상 복수형일 수밖에 없는 게, 항상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죠. 원서 13쪽에 ‘생산하기’, ‘생산물’, ‘생산물과 생산하기의 동일성’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작용 자체를 “순환으로서의 무의식의 자기-생산(auto-production)”이라고 합니다(원서 40쪽). 생산물은 생산하기로 항상 가지를 뻗고, 생산하니까 당연히 생산물이 만들어지고, 그다음 다시 생산물은 생산하기로 가지를 뻗고….

그래서 스피노자의 자연 개념이 갖고 있는 두 국면과 대응할 수 있다고 했죠. 생산하기는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의 국면이고 생산물은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의 국면이며, 이 둘은 사실은 하나다, 대문자 자연(Natura)이다, 이런 거죠. 스피노자에게는 그게 신이고 실체입니다. 들뢰즈·과타리가 염두에 둔 게, 능산적 자연와 소산적 자연와의 동일성으로서의 자연 개념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자기 변화를 겪어가는 거죠.

들뢰즈·과타리는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항상 시간의 화살, 시간의 일방향성을 따라 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선형 계열’이라고 표현합니다. 생산이 계속 이어져 갑니다. 시간 순서로 그림을 그리면 이런 모양이 됩니다[[그림 참조]]. 어떤 한 국면을 도려내면, 이쪽이 생산하기이고 시간을 멈춘 저쪽이 생산물이고, 다시 이게 생산하기로 이어지고 그다음 국면이 이어집니다. 우주 전체를 스냅사진으로 찍었다 생각시면 됩니다. 다시 말해 정지시킨 거죠. 그것이 생산물의 국면입니다. 여기서 ‘순간’이라는 개념은 이해하기가 참 어려워요. 매순간 다시 생산하기로 이어지고, 그리고 매순간 생산물이 되고…. 그런 과정을 겪는다는 거죠. 이게 생산의 경과입니다.

이 때 멈춘 그 순간이 ‘기관 없는 몸’입니다. 이때 생산을 수행하는 존재, 그게 욕망 기계들입니다. 생산의 경과라는 시간성이, 들뢰즈·과타리가 명시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지만,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동그랗게 그린 저게, 실제적으로는 멈춘 계기예요. 사실 순간을 상정하기는 어려운데, 계속 가니까요. 원래는 단절의 국면이 없습니다. 그러나 관념적으로 한 번 멈춰보고 설정하는 거죠. 그게 선형 계열 속의 제3항이죠. 그러니까 이건 진짜 절단면이라서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 수가 없는데, 얇은 막 같은 것으로 이해해 봐도 좋습니다. 경과는 사실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봐야지 맞을 것입니다. 우주의 바깥은 없는 거죠. 우주에 내재해서 생산의 경과가 진행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랬을 때, 제3항, 분화되지 않은 거대한 대상을 형성하는 데,“모든 것이 한순간 정지하고, 모든 것이 응고된다(그 다음에 모든 것이 재개된다)”(원서 13쪽), 그걸 언어로 표시한 국면입니다. 그러고 나면 욕망 기계들의 층위와 정지 상태의 저 층위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얘기해야 하는 거죠. 기관 없는 몸을 ‘반-생산(anti-production)’이라고 칭합니다. 생산에 반대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칭하기는 했지만, 그것마저도 거대한 생산의 경과의 한 부분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굳이 표현하면, 욕망 기계들을 ‘working machine’, 작동하는 삶의 국면이라고 한다면, 기관 없는 몸은 죽음의 국면이죠. 욕망 기계들이 ‘건설’과 ‘구성’의 국면이라면, 기관 없는 몸은 ‘파괴’와 ‘해체’의 국면입니다. 모든 게 파괴되고 해체되는 국면. 그러면 왜 기관 없는 몸이 개입되어야만 하는가가 그 다음 질문입니다. 그것은, 해석해 보자면, 새로움이 가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깐 이 순간을 통해 ‘우연’이 개입했고, 우연을 통해서 새로운 다음 단계가 가능해진다는 거죠. 만약에 우연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우주의 시초부터 우주의 종말까지 예정된 길을 걷게 됩니다. 필연적 과정에 머물고 말 겁니다. 그러나 매순간 우연이 개입하기 때문에 우주 삼라만상의 변화, 실제 모습이 생겨날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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