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요. “죽음 본능, 그것이 그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의] 이름이며, 죽음은 모델이 없지 않다.” 죽음에 관해서는 뒤에 가면 중요한 언급들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단순하게 생각해도 됩니다. 기존의 조직화의 해체, 그래서 새로운 조직화가 일어날 수 있는 순간, 그게 죽음이에요. “사실이지, 욕망이 이것 즉 죽음 역시도 욕망하는 까닭은 죽음이라는 충만한 몸이 욕망의 부동의 모터여서인데, 이는 욕망이 삶을 욕망하는 까닭이 삶의 기관들이 작동하는 기계(working machine)여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결국 죽음과 삶은 서로 생산하기 위해 꼭 필요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부품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부동의 모터’는 아까 말한 ‘프라임 무버’를 표현하는 다른 방식인데, 여기서는 출발점이 된다는 뜻입니다. 어차피 순환을 형성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아무 지점이나 한 점을 끊을 수 있어요. 끊어서 일종의 백지상태 같은 것을 가정하는 거죠. 백지상태이기 때문에 새로운 게 시작할 수 있다. 그게 ‘작동하는 기계’입니다. 그다음에 새로운 게 또 시작하고 등장하려면 멈추는 상태가 필요한 거예요. 기존 철학에서는 백지상태가 출발점에서 한 번 필요한데, 여기서는 백지상태가 계속 등장합니다. 물론 새로운 생산, 작동하는 기계도 계속되고요. 이 둘이 계속 맞물려 가야 생산의 경과가 일어나는 거죠. 그다음에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것이 어째서 함께 어우러져 작동 하는지 묻지 말라. 이 물음조차도 추상의 산물이다. 욕망 기계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고장 내면서 고장 난 채로만 작동한다.” 삐걱거림, 기존 상태가 멈춰버림, 이런 게 고장입니다. 그래야만 다음 생산이 이어질 수 있죠. 그런 걸, 왜 그러냐고 자꾸 묻는 건 추상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지금 들뢰즈·과타리가 얘기하는 것은 현실이 이러하다는 것에 대한 보고서에 가까운 거죠. 이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다시 그 문장요. “욕망 기계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고장 내면서 고장 난 채로만 작동한다. 법원장 슈레버는 <오랫동안 위도 없고 장도 없이, 거의 폐도 없이, 식도는 찢긴 채, 방광도 늑골도 없이 살았으며, 이따금 후두의 일부를 먹었고, 만사가 이랬다.> 기관 없는 몸은 비생산적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연결 종합 내에서 자기 장소와 자기 시간에 생산하기와 생산물의 동일성으로서 생산된다(분열증적 탁자는 하나의 기관 없는 몸이다).” 기관 없는 몸이란 생산의 경과를 활동사진이 아니라 스냅사진으로 딱 찍었을 때의 상태, 정지하고 멈춘 상태입니다. 활동사진의 다음 장면에는 이것과는 다른 장면이 찍혀있게 되죠.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기존 상태와 비교할 때 앞의 시간대에 찍혀있는 것은 다 무화되고 죽어버린 겁니다. ‘자기 장소와 자기 시간’이라고 했죠. 앞에서는 ‘제3의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즉, 연결 종합 속에서, 생산물-생산하기의 연쇄 운동 속에서, 그 선형 사슬의 곁에서 생산되는 제3의 무엇이라는 말이죠. 여기에서도 다시 ‘생산하기와 생산물의 동일성으로서’ 생산된다고 얘기됩니다. 이 동일성은 논리적 동일성(a=a)이 아니라 순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기관 없는 몸이 이 연쇄, 이 선형 사슬, 이 동일성 혹은 순환 외부에 있는 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거기에 딱 붙어 있습니다. 뒤에 언급되겠지만, 일종의 생산이 일어나는 바탕 노릇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듯, 기관 없는 몸은 생산의 생산의 부산물로 생산됩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관 없는 몸은 본원적인 무(無)의 증인이 아니며, 잃어버린 총체성의 여분도 아니다. 특히 그것은그 어떤 투사가 아니다. 그것은 흔히 얘기되는 몸과, 또는 몸의 이미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이미지 없는 몸이다.” 이미지 없는 몸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떤 것이 존재하되, 이미지가 없어요. 우린 그에 대해서 알 수가 없어요. 죽음도 그래요. 우린 죽음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또 들뢰즈가 표현하듯, 영점 상태(degree zeor)도 우리가 알 수 없어요. 거기에 대한 이미지는 없어요. 그건 이미지 없이 생산이 일어나는 어떤 근원입니다. 그래서 거듭 ‘비생산적’이라고 묘사됩니다.
“그것은 비생산적이어서, 그것이 생산되는 그곳에, 이항-선형 계열의 제3의 시간에 실존한다.” 아까 그림[[그림 참조]]으로 보여드린 이 단면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됩니다. “그것은 생산 속에 끝없이 재주입된다.” 그러니까, 생산의 생산이 이어지려면, 기관 없는 몸은 계속 생산의 연쇄 사슬 안에 들어가야 하는 거죠. “긴장병의 몸은 욕조의 물 안에서 생산된다.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은 반(反)생산에 속한다. 하지만 생산을 반생산과, 반생산의 요소와 짝짓는 것은 여전히 연결 종합 내지 생산적 종합의 한 특성이다.” 그러니까, 이번엔 생산과 반-생산이 계속 짝지어지고 연결됩니다. 그게 생산적 종합, 연결 종합의 특징입니다. 삶과 죽음을 한데 모으는 게, 생산적 종합, 연결 종합의 특성입니다. 연결 종합에서는 ‘그다음에’라고 할 때, 이 사이에 위치하는 게 기관 없는 몸인 거죠.
무지하게 달렸습니다. 오늘은 첫 시간이고 시작하는 단계니까, 여기까지 봤습니다. 원소 6쪽에서 15쪽까지입니다.
그런데 그 뒤도 어렵습니다. 두 번째 종합을 다루는 2절, 세 번째 종합을 다루는 3절. 여전히 어렵긴 한데 최대한 읽어보고 어디가 어려운지를 체크해 오세요. 다음 시간에 가능하면 2, 3절까지 해서 세 가지 종합을 정리해보고 싶고요. 그다음 시간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파시즘과 자기 억압을 욕망하는 문제를 다루고, 그 후엔 기계들과 부분과 전체를 다루는 식으로 이어갈까 합니다. 긴요한 질문 없으면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1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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