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008

첫째 종합: 연결 종합 또는 생산의 생산

종합의 첫 번째 형식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앞서 보았듯, 잘 보면 “그리고, 그 다음에…”라고 했습니다. 일부러 시간적인 의미로 “그다음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et puis”에서, “puis”는 시간적 연속(그다음에, 그리고 나서, 그 후에), 장소의 연장(더 멀리로, 그 뒤에, 그다음에), 공간적 열거(그리고 또, 게다가, 그다음에) 등의 의마가 있습니다. 본래는 시간적 의미만 갖고 있진 않습니다. 그러나 들뢰즈·과타리에겐 시간적 의미가 일차적이에요. 왜 시간적 의미를 더 강조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컷을 놓고 보면, 이것과 저것은 동시성의 관계에 있습니다. ‘입’과 ‘젖가슴’은 동시에 함께 탄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과 저것은 순차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다음에, 그다음에…. 장(腸)부터 시작됐나요. 거슬러 가는 거죠. 위, 식도, 입, 그다음에 가축들의 흐름까지. 이렇게 가는 일련의 과정은 시간성을 분명히 갖습니다. 이 시간성은 무시해서는 안 되는 측면입니다. 논리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아요. 논리적인 것은 시간성을 배제한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것은 항상 시간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언제 일어났느냐가, 어떤 사건, 또는 어떤 절단, 또는 어떤 만남이 언제 일어났느냐는 순서가 굉장히 중요해요.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간성에 관련된 부분은 이야기할 기회가 또 조금 있을 거고요.

원서 12쪽 아래 새로 시작하는 문단입니다. 방금 얘기한 것을 조금 더 논리적인 방식으로 정리합니다. “따라서 연결 종합의 짝짓기, 즉 ‘부분대상-흐름’은 […]”. 이때의 하이픈은 짝짓기, 연결을 가리킵니다 “[…] ‘생산물-생산하기’라는 또 다른 형식도 갖고 있다.” 여기서의 하이픈은 짝짓기, 연동이 아니라 동일성 관계입니다. 앞서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이라고 할 때와 같은 의미의 동일성, a=a가 아니라 ‘순환’ 속 동일성 말입니다. 문장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하이픈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걸 알아야 해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진술의 뉘앙스를 잘 따라가는 거죠.

이어서 보면. “생산물에는 언제나 생산하기가 접붙으며, 바로 이런 까닭에, 모든 기계가 기계의 기계이듯, 욕망적 생산은 생산의 생산이다.” 말이 조금 어려운데, 순차적으로 보죠. 우선 생산물이, 어떤 결과물이 있습니다. 그 결과물에는, 항상 생산하기가 접붙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는 “Toujours du produire est greffé sur le produit”입니다. 영어 번역은 “Producing is always something “grafted onto” the product.” 두 문장의 뉘앙스는 같은데, 영어에 ‘접붙는다’에 왜 따옴표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서는 분명합니다. 먼저 ‘생산물’이 있고, 그다음에 여기에 ‘생산하기’가 접붙습니다. ‘생산하기’는 동사인데, 접붙어서 생겨나오는, 뻗어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과물은 결과물로, 생산의 결과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음 단계로, 새로운 생산으로 이행한다는 겁니다. 굉장히 중요한 진술인데, 왜냐면 이건 논리적인 진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생산물이 있으면, 그 생산물에서 항상 다음 단계인 생산하기로 뻗어나간다는 건, 꼭 그래야 할 논리적 필연성은 없지만, 이른바 경험적 필연성은 있습니다. 우주가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 관찰하니 그렇더라, 라는 진술이죠. 그래서 ‘욕망적 생산’은 일차적으로 ‘생산의 생산’이라고 말하는 건, 항상 생산의 생산이 일어난다고, 그리고 그게 일차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문장에 “표현이라는 관념론적 범주는 만족스러울 수 없다.”고 한 겁니다. “생산과정에 결부하지 않으면서 분열증적 대상을 기술하려고 꿈꿀 수도 없고, 꿈도 꾸지 말지어다.” 생산과정에 대한 뭐랄까요, 기술(記述)입니다. 있는 그대로 묘사한 거예요. 관찰해 보니깐, 어떤 생산물이 있으면 그 생산물은 반드시 생산하기로 나아가더라는 거죠. 존재론이라는 게 원래 구성의 산물입니다.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현실과 일치하게 존재론을 구성하는 게 필요한 법인데, 들뢰즈·과타리가 여기서 작업하는 게 그런 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라는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요. 어떤 생산물이 있을 때, 왜 그것이 또 다른 생산하기로 나아가느냐? 이 의문에 대한 유일한 답은 그냥 ‘우주가 그렇다.’입니다.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 우주가 운행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이 말 말고는 답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나머지는 다 관념론적이라는. 그러니까 어떤 것이 있을 때, 그것의 다음 단계가 어떤 원인 때문에 생겨난다는 걸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관념론적인 접근이라는 거고요. 현실적인 접근, 리얼리즘, 유물론은, 있는 게 그건데 다른 걸 뭘 또 붙이느냐, 여기서 머뭅니다.

그러면서 《아르브뤼》(art burt) 잡지들을 얘기합니다. ‘아르브뤼’는 ‘날것(brut, savage)’인 예술이라는 뜻입니다. 한국에도 장 뒤뷔페(Jean Dubuffet)의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책이 출판된 적이 있어요. 아르브뤼 작품을 모아놓은 도록이에요. 뒤뷔페가 정신병자, 혹은 분열증자의 그림을 수집해서 전시하고 팜플렛으로 만든 거예요. 그게 여기서 말하는 《아르브뤼》 잡지입니다. 여로 호가 나왔는데, 아르브뤼는 예술성 때문에 사람들이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신병원에 갇힌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이지만, 실제로 그들을 그렇게 가두지 않았으면, 가장 탁월한 예술가가 되었으리라는 것의 좋은 사례입니다. 거기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굉장히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참고: https://www.artbrut.ch/en_GB/authors/the-collection-de-l-art-brut)

그리고 앙리 미쇼(Henri Michaux)의 예를 듭니다. “욕망의 경과인 생산의 경과와 관련하여 분열증적 탁자를 묘사한다.” 꽤 길게 인용했습니다. 하나의 ‘묘사’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묘사가 워낙 탁월해요. 인용문은 건너뛰겠습니다. 탁자가 스스로 증식하는 거예요. 욕망적 생산이 그러하다는 거죠. 생산물에 생산하기가 계속 덧붙여집니다. 제 책상도 그런데, 늘 올려놓은 책들이 있으면, 또 어떻게 틈 만들어 또 쌓고 해서 나중에 밑에 있는 책 꺼내기도 힘들어요. 그런데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이 그렇다는 거예요. ‘생산의 생산’이 뜻하는 바가 그렇다는 겁니다. 다만 그 탁자는 스스로 그 일을 하죠. 내 책상에는 내가 책을 올려놓죠. 외부의 원인이죠. 그런데 이 탁자는 스스로 계속 증식해요. 차이점이죠.

계속 보겠습니다. “분열자는 보편적 생산자다. 여기에서 생산하기와 그 생산물을 구별할 여지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분열자가 분열적 책상, 탁자 자체라고 이해하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인간 분열자는 바로 이런 존재다, 이런 생산의 경과에 합일한 존재다, 그렇게 이해하면 확실합니다. 그리고 보편적(universel, universal)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다른 의미로 우주(universe)와 관련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주의 운행’과 ‘보편적 생산’은 실제로 같은 뜻입니다.

“여기에서 생산하기와 그 생산물을 구별할 여지는 없다.” 왜냐면 생산물은 계속 생산하기로 뻗어가고 생산하기는 생산물을 낳는 순환 과정에 있으니까요. 생산물에서 출발해서 생산하기로 가고, 생산하기는 당연히 생산물을 만들어 내니깐, 이게 다시 생산하기로 이어지는 거죠. 그림으로 그리면 이런 식이 되는 거죠. [[그림 참조]] 생산물이 먼저죠. 그다음에 생산하기. 이게 순환을, 사이클을 이룹니다. 계속 도는 거죠. 이것이 생산의 생산이라고 부르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한 번 더 말하지만, ‘그러하다’라는 거지 ‘왜 그러하냐’는 얘기되지 않고 있어요.

내가 볼 때, 이 둘의 과정과 이 논법은 스피노자한테서 왔습니다. 스피노자에게는 자연(natura)은 두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산된 것으로서의 자연, 소산적 자연이라고 부르고요. 이게 나투라 나투라타(natura naturata)입니다. 그다음은 생산하는 자연으로, 나투라 나투란스(natura naturans)입니다. 서양에서 자연(physis, natura)은 원래 생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투라 나투라타와 나투라 나투란스의 동일성으로서 대문자 자연(Natura)이 있습니다. 그게 생산하기와 생산물의 동일성으로서의 생산이란 말에 정확히 대응됩니다.

조금만 더 보면요. 적어도 생산된 대상은 자신의 여기를 새로운 생산하기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적어도 생산된 대상은 자신의 여기를 새로운 생산하기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이탤릭체로 강조된 ‘여기’는 프랑스어로 ici, 영어로 here인데, 이건 사실상 시간적 의미를 함축합니다.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생산은 시간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제자리 뛰기는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다음에, 그다음에…. 이런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여기’를 새로운 생산하기로 뻗어가는 겁니다. 그렇다고 할 때, 여기라는 ‘이 순간’ 또는 정태적인 어떤 ‘지점’, 더 정확히는 어떤 ‘시점(時點)’이 중요합니다. 뒤에 나올 ‘기관 없는 몸’이 바로 ‘여기’에 위치합니다. 생산은 계속 이어져요. 물리적으로도 자연적으로도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걸 멈춰서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우주의 운행을 잠깐 멈춰보는 거죠.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논리적으로 멈추는 거예요. 물론, 물리적으로는 계속됩니다. 명심해 두세요. 이게 기본이에요. 멈춤의 계기 직후에, 다시 생산이 재개됩니다. 이어서 보면요. “탁자는 <자기 일>을 계속한다. 탁자 윗면은 틀에 먹혀 버린다. 탁자가 종결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생산의 지상명령이다.” 이렇게까지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레비스트로스의 ‘임시변통 재주’, 즉 브리콜라주(bricolage) 얘기, 아빠-엄마 놀이가 유치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 대목은 건너뜁니다. 그다음에 정리 발언이 나옵니다. “생산하기를 항상 생산 하기, 생산물에 생산하기를 접붙이기라는 규칙은, 욕망 기계들의, 또는 생산의 생산이라는 1차적 생산의 특성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얘기입니다. 끝으로, 린드너의 그림 ‘기계와 함께 있는 소년’을 언급하며, 아이는 자신의 작은 욕망 기계를 “거대한 사회·기술 기계에 접붙여서 기능”하게 한다며 문단을 마감합니다. 온통 기계들의 기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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