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가 균형감각을 견지하려는 게 옳은 걸까?

일반적으로 어떤 사상가를 연구하는 까닭은, 우선은 그로부터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흥미로운 생각을 얼마나 많이 제공하느냐에 따라 특정 사상가의 ‘크기’가 규정된다. 이를 사상 영역에서의 자연선택이라 하겠다.

인간에게는 그런 사상가 풀이 있고, 여기에 흔히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고전의 풀에 흘러든 사상가는 수가 많은데, 그렇다면 이들 사이에 어떤 위계를 매길 수 있을까? 한 사상가가 다른 사상가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서 이른바 ‘균형감각’이라는 좋지 않은 해법이 출현하는 것 같다.

연구자가 ‘균형감각을 갖는다’는 것에는 모종의 전제가 깔려 있다. 연구자는 무릇 고전의 풀에 완전히 잠기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혹은 있어야 한다는 전제. 그래야만 어느 하나에 치우침 없이 각 사상가를 ‘비교’하고 ‘저울에 놓는’ 일이 가능할 테니까. 그런데 이런 전제는 애초에 적절하게 성립하기 어렵다. 학생 시절에야 각 사상가를 충실하게 이해하는 훈련이 꼭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 최대한 충실하게 각 사상가를 따라가고 따라잡아야 했겠지만, 이제 고전의 풀을 개관한 후 자기만의 관점을 지닌 연구자의 입장에서 여전히 학생 같은 자세를 견지한다면 미숙함의 발로일 뿐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연구자가 자기만의 저울로 고전의 풀을 재고 그 결과 특정 사상가에게 ‘강한 부정’이나 ‘진심 어린 친화’를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미숙함의 징표로 여겨지곤 한다. 이른바 ‘균형감각’이 없다는 거다.

하지만 이런 평가에는 취향에 대한 몰취미가 깔려 있다. 평가란 본래 편파적일 수밖에 없고, 평가한다는 건 자신의 실존을 건다는 뜻이다. 미학적 의미의 취향 또는 취미가 중요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취향에 따른 판단은 본래 객관적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편성과는 다른 취향의 등급이라는 게 엄존한다. 고만고만한 입맛을 능가하는 어떤 맛과 그 맛에 대한 느낌은 강력하다. 자기가 선호하는 맛들에 대한 선호와 목록이 없다면, 과연 존중할 만한 사람일까? 하물며 연구자일진대! 맛에서 균형감각을 견지한다는 건, 편식하지 말고 모든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한다는 걸 뜻한다. 다른 말로 하면, 몰취미다.

물론 참조하는 사상가가 사안 별로 달라질 수도 있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한 명의 사상가란 없다는 점은 동의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사상가의 결이다. 도무지 한 자리에 함께 놓기 힘든 여러 사상가가 있을 때, 연구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옳을까? 상반되는 두 사상가 중간에서 중립적인 높이로 서 있으면 되는 걸까? 그런 중간 위치와 높이라는 게 과연 있는 걸까?

의미와 가치가 비판의 준거라는 니체와 들뢰즈의 선언은 참으로 미학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우선 의미와 가치의 개념마저 비판적으로 갱신했다. 나는 훨씬 젊었을 때부터 이 길에서 매력을 느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균형감각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었다.

 

(2018.04에 쓴 글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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