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007

욕망 기계, 부분대상들, 흐름: 그리고그다음에

자, 그 다음에 얘기가 확 전환됩니다. 소절 제목에 세 가지 개념이 등장합니다. 욕망 기계, 부분대상들, 흐름. 또한 ‘그리고… 그다음에…’라는 접속사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세 가지 하위 부류로 나뉘는 넓은 의미의 생산 말고 그렇게 나뉜 셋 중 하나인 좁은 의미의 생산, 즉 ‘생산의 생산’의 형식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연결’ 혹은 ‘연결 종합’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짝짓기’라고도 했습니다. 이제부터 그걸 보겠습니다. 원서 11쪽 중간의 새로 시작하는 문단입니다.

“욕망 기계들은 이항 규칙 또는 연합 체제에 따르는 이항 기계이다.” 이항 규칙이라는 것은 두 개가 쌍을 이룬다는 겁니다. 연합이라는 것도 두 개가 쌍을 이루면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기계는 언제나 다른 기계와 짝지어 있다.” 이건 원천-기계와 기관-기계, 혹은 에너지-기계와 기관-기계, 이 둘이 연결된 거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최소한이에요. 실제로는 하나와 하나만 연결이 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뒤에 언급되지만, 사방으로 그물처럼 뻗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특징적인 최소의 부분을 주목해 보는 거예요. “생산적 종합, 생산의 생산은 […]” 좁은 의미의 생산이라는 점을 언급한 겁니다. “[…] <그리고>, <그다음에>……라는 연결 형식을 갖고 있다.” 소절 제목과 이 대목이 약간 다릅니다. 소절 제목은 프랑스어로 “et… et…”입니다. 영어로 “and… and…”, 독일어로 “und… und…”, 일본어로 “そうして… そうして…”입니다. 이 대목은 프랑스어로 ““ et”, “et puis”…”, 영어로 ““and…” “and then…””, 일본어로 ““そうして” “そうして次に]”…”입니다. 뜻은 다 같은데, 콤마와 말줄임표 위치가 묘하게 다르네요! 한국어본은 프랑스본과 똑같은 위치에 표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소절 제목과 이 대목의 차이가 무엇이냐를 보아야겠지요. 소절의 ‘그리고’는 공간적 열거와 시간적 순서를 모두 포함합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공간적 열거(가령 곁에, 위에, 아래에 등)의 의미는 사라지고 시간적 순서만 남습니다. 들뢰즈·과타리가 말하는 ‘그리고’는 시간적 순서를 뜻합니다. 이걸 오해하면 모든 해석이 혼돈에 빠집니다.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흐름을 생산하는 어떤 기계와 이 기계에 연결되는, 절단을, 흐름의 채취를 수행하는 또 다른 기계가 늘 있으니 말이다(젖가슴 — 입).” 다시 젖가슴과 입이라는 특권적인 사례가 등장합니다. 전자(젖가슴)는 흐름을 생산하는 기계죠. 후자(입)는 이 기계에 연결되면서 절단을 행하는 기계입니다. 절단에는 셋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 중에 ‘채취-절단’입니다. 이렇게 젖가슴과 입이 이항기계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저 처음 기계는 […]” 처음 기계는 이 경우에 젖가슴이죠. “그 나름으로는 절단 내지 채취 같은 작동을 통해 관계를 맺는 또 다른 기계에 연결되기 때문에, […]” 그 앞 단계의 기계와 관련해서는 젖가슴이 채취 절단을 행하는 기계라는 말입니다. “이항 계열은 모든 방향에서 선형 (線形)이다.” 이항 계열이 모든 방향에서 선형이라는 건, 쭉 거슬러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입이 있고, 젖가슴이 있고, 그 앞에 또 뭔가 있고, 하는 식으로 하여튼 쭉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걸 잘 묘사한 게, 원서 44쪽에 중간 조금 아래에 있습니다. 그 문장을 보면요. “가령 항문-기계와 장-기계, 장-기계와 위-기계, 위-기계와 입-기계, 입-기계와 가축 떼의 흐름(<그다음에, 그다음에, 그다음에……>).” 이런 형식을 이룬다는 겁니다. 이게 방금 전에 이항 계열이 모든 방향을 선형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시간 역순으로 쭉 연결될 수 있다는 거예요. 어떤 ‘채취-절단’과 ‘흐름’은 항상 쌍을 이룬다, 이항관계를 이룬다, 그런 의미죠.

앞으로 돌아와서 계속 봅니다(원서 11쪽 하단). “연속된 흐름들과 본질적으로 파편적이면서도 파편화된 부분대상들의 짝짓기를 욕망은 끊임없이 실행한다.” 다시 말하면, 한편에는 흐름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잘라낸 결과가 있습니다. ‘파편’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게 부분대상이라고 말씀드렸죠. ‘연속된 흐름’이라고 할 때, ‘연속’이 뭘 뜻하냐면, ‘한정, 구별, 제한’(peras; termus, finis; fin, end)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무한’이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프랑스어로 ‘앵피니(infini)’, 영어로는 ‘인피니트(infinite)’인데, 앞에서 말한 ‘피니스(finis)’에서 유래했습니다. 부정 접두사 ‘in’을 붙인 거예요. 한정이 없다는 겁니다. 한정이 없어서 구별할 수 없으면 철학적으로 ‘무한’한 겁니다. ‘아페이론’이 무한한 겁니다. 무한에 대해서 들뢰즈가 가끔 얘기하는데, 대부분즈의 용법은 페라스가 없는 겁니다. ‘무한’과 ‘횡단’과 ‘가로지름’, 이런 용어들은 다 같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채취-절단 뒤에 나오는 두 번째 절단이 이탈-절단입니다. ‘이탈’로 번역한 말은 프랑스어 ‘détachement’, 영어로 detachment, 독일어로 ‘Abtrennung’, 일본어로 ‘離脱’입니다. ‘흐름들과 부분대상들의 짝짓기’라고 표현했는데, 지금 사례에서 흐름이 젖가슴이고 부분대상이 입입니다. 이게 한편으로는 수평이고 한편으로는 수직인데요. 젖가슴도, 입도 사실은 다 부분대상입니다. 항상 상대적이에요. 입이 부분대상으로 존재할 때 그 흐름을 방출하는, 입에 의해 채취 절단된 쪽이 흐름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젖가슴도 항상 또 다른 흐름과 관련해서는 부분대상입니다. 이게 정태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그다음에, 그다음에, 그다음에…’의 방식입니다. 연달아 있는 거죠(successive). 그런 특성을 특성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 대목에서는 욕망이 하는 일이 뭐냐를 아까와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까는 ‘순환의 내재적 원리’라고 했는데요, 이번에는 흐름과 부분 대상의 짝짓기 또는 연결을 실행하는 게 욕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한다.” 특히 앞의 흐름과 뒤의 절단이라는 특성이 중요합니다. 헨리 밀러(Henry Miller)를 인용하는데, 조금 건너뛰겠습니다. “이 흐름들은 부분대 상들에 의해 생산되며, 다른 흐름들을 생산하는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부단히 절단되고,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재절단된다.” 앞에서 말한, 끊임없이 선형 과정을 이룬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죠. “모든 <대상>은 흐름의 연속성을 전제하며, […]” 여기서 꺽은 괄호, 프랑스어의 인용부호로 묶은 ‘대상’은 부분대상이라는 걸 전제합니다. 모든 대상은 부분대상이에요.들뢰즈·과타리 철학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죠. 고정되고 불변하는 대상이란 없으니까요. 단순한 의미에서 ‘인식론’이 성립할 수 없어요. 인식론은 불변하는 대상과 불변하는 주체가 관계를 맺는 것을 전제하는데, 들뢰즈·과타리에겐 그런 게 없어요. 그래서 인용부로를 씀으로써 모든 대상은 부분대상이라는 걸 암시합니다.

“모든 <대상>은 흐름의 연속성을 전제하며, 모든 흐름은 대상의 파편화를 전제한다.” 이 관계는 지금까지 설명된 내용과 관련됩니다. 그 다음이 흥미로워요. “물론 각각의 기관-기계는 자기 고유의 흐름에 따라, […]” 이 구절에서 ‘자기 고유의 흐름’은 ‘코드(code)’ 내지 ‘규정’이라는 말로 바꿔도 별 상관없습니다. “[…] 이 기관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에 따라 전 세계를 해석한다. 가령 눈은 모든 것을, 즉 말하기, 듣기, 똥 싸기, 씹하기 등을 보기의 견지에서 해석한다. 하지만 하나의 횡단선 속에서, […]” 여기서 ‘횡단선’은 다른 것들을 다 무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특성들을 없애는 거죠. 앞에서 말한 ‘무한한 흐름’으로 되돌리는 작용입니다. “[…] 어떤 다른 기계와 늘 하나의 연결이 설립된다. 이 횡단선 속에서, 저 처음 기계는 다른 기계의 흐름을 절단하거나, 다른 기계에 의해 자신의 흐름이 절단되는 것을 <본다.>” 이 대목에서 특정한 절단이 나머지 것들을 다 횡단하면서, 즉 나머지 규정들을 다 건너뛰고 무효로 만들면서 자기 절단의 측면만 남겨놓는다고 할 수 있죠.

여기에 ‘본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건 눈이라는, 시각이라는 것을 특권화하는 방식입니다. 사실은 ‘본다’는 말은, 내가 박사논문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희랍적인 특히 플라톤적인 유래가 있습니다. ‘이데아(idea)’라는 게 ‘본 것’이라는 뜻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eidos)’도 ‘본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 희랍어 ‘보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처럼, ‘보는 작용’과 ‘보이는 것’의 관계 맺음을 언급하는 것은 플라톤에 대한 오마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앞에서는 훨씬 더 오래된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에 대한 오마주였고요. 하지만 첫 번째 오마주는 멜라니 클라인에게 바쳤죠. ‘입’이라는 특권적 대상을 책 첫 줄부터 언급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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