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와 뭉크 – 고통을 살아낸 자리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보냈기 때문에, 라든지 유독 많은 生의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라는 근거에 기대 해석해서는 안 되는 삶과 作品이 있다. 고통과 절망을 얘기하는 것들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기형도와 뭉크를 보자.

기형도의 「가는 비 온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과 함께, “「휴일」이란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인질극을 벌이다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던 지강헌이 시의 소재이다.

가는 비 오는 날, 그 사건이 있었던 집 앞을 지나면서 시인은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고 진술한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로 이어지는 구절은 이 진술을 죽음에 만성적으로 습격 당해야 하는 현대인의 초상으로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죽음 앞에 서야 하기에 삶은 무의미하다’는 절망의 선언이 결론은 아니다.

위의 진술은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라는 다음 행의 반전 속에서야 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차라리 죽음과 벌이는 필사적인 ‘반항'(카뮈적인)인 것 같다. 그래서 빗방울/죽음과 장난을 치는 거위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일 수밖에 없다. “가는 비…는 사람의 바지를 조금씩 적실 뿐”이다, 그러니 그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것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비밀이자 비법이다. 또한 시인은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鳥致院」)이라고 너그럽게 노래할 수 있었다. 유희, 예술의 승리. 詩作의 니체주의.

그의 때 이른 죽음 때문에 고통이 기형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추측이 무성하다. 하지만 그의 시는 삶에 대한 사랑이다. 초고로 남은 「내 인생의 中世」에서 읽어보자. “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 / 너무 오래되어 어슴프레한 이야기 / 미루나무 숲을 통과하던 새벽을 / 맑은 연못에 몇 방울 푸른 잉크를 떨어뜨리고 / 들판에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나그네가 있었지요 / 생각이 많은 별들만 남아 있는 공중으로 / 올라가고 나무들은 얼마나 믿음직스럽던지 / 내 느린 걸음 때문에 몇 번이나 앞서가다 되돌아오던 / 착한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 나는 나그네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았지요” 기형도 특유의 관념어와 만연체가 그윽한 이 시는, 한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두 번째 시집의 제목으로 쓰려 했던 유품이다. 한번 그런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보라.

뭉크의 대표작 「절규(Der Geschrei der Natur; The Screem)」는 사람과 세상을 온통 빨아들이는 자연의 힘을 보여준다. 그 힘은 모든 것을 無化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이 파도친다. 하지만 뭉크에게서도 고통은 죽음을 향한 유혹과는 거리가 멀다. 그건 차라리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것과 유사하다.

뭉크는 「절규」를 그리고 나서 이렇게 적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한편으로 도시가 보이고 아래로는 협만이 펼쳐진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피곤했고 몸이 좋지 않을 때였다…. 해는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게 물들어 갔다. 나는 비명소리가 자연을 가로지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마치 그 비명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이 그림을 그렸다. 구름은 진짜 피처럼 그렸다. 색채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이처럼 절규는 1) 자연을 가로질러 2) 나에게 느껴진/들린 후 3) 색채로 표현된다(또는 목판화의 선을 살린 석판화로 표현된다). 주목하자. 절규는 주인공에게서 세상을 향해 터져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나와 주인공을 관통하는 흐름이었던 것. 다시 말해 그것은 자연 자체인 힘의 흐름이었던 것. 뭉크는 공포나 고통에 압도당해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었으며, 차라리 그것들을 직시한 결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회화의 스피노자주의.

그런 시선은 말년의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에서 아주 잘 표현된다. 한 평자는 이렇게 말한다. “남은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와 머지않아 죽어 눕게 될 침대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화가는 그의 그림들을 배경으로 하고 서서, 운명을 직시하고 있다. 음울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밝고 화사한 색채는 긍정적이고 심지어는 의기양양하기까지 하다. 그의 예술은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살아남을 것이다.” 이처럼 뭉크의 그림은 그 암울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절망의 늪에 빠뜨리는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힘과 흐름을, 다시 말해 생명 그 자체를 드러내는 그림이다.

고통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고통의 ‘표현’은 타인에게 동정을 호소하고 재촉하는 일도 아니고 나르시스적인 자기 동정의 누출도 아니다. 고통에 대한 집요한 관심은, 아니 그것마저도, 삶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오해 말자. 삶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며 삶을 저주하는 것 사이의 깊은 틈에 대하여. 좋은 예술가는 그 틈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거기서 기형도와 뭉크의 먼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999년 11월 15일자 고대대학원신문(제80호)에 수록된 글을 약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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