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집단이 거의 전부다 : 누구랑 밥 먹느냐가 관건이다

집단이 왜 중요할까? 인간은 종(種) 수준에서부터 철두철미 사회적 존재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고인류학자, 인류학자, 선사학자인 앙드레 르구아구랑(André Leroi-Gourhan)의 《손놀림과 말 》 연작(1964~65)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중요한 사상가에 대해서는 내가 논문을 한 편 썼다.) 인간은 종, 기술, 사회(혹은 민족) 측면에서 각각 해명될 수 있다고 르루아구랑은 주장한다. 기술과 언어활동과 예술은 각 층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각설하고, 인간은 함께 대화하고 밥 먹는 주변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한다. 함께 먹는다는 건 생각을 나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입 닥치고 먹지 않는다. 먹는 내내 수다 떤다. 그러는 동안 생각이 오가고, 생각이 때론 공유되거나 모방되고 때론 수정되거나 배제된다.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 하는 내용의 진실성 여부도, 옳은지 그른지 하는 자세의 윤리성 여부도, 생각의 교류라는 과정에 비하면 아주 부차적이다. 사람 사이에 생각이 오가면서 서로 묶이는 과정만큼 신비한 것도 없을 것이다. 만일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같이 먹다 체한다.

따라서 강제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가령 교수와 학생, 상사와 부하직원, 상급자와 하급자 등), 인간은 생각이 다르면 어울리지 않는다. 한 개인을 둘러싸고 어느 정도 버블(비눗방울)이 있다는 말인데, 이 ‘인간관계 버블’은 인간의 사회생활을 규정하는 필수 조건이다. (이 버블을 잘 파악한 학자가 야콥 폰 윅스퀼이고, 그가 제시한 개념이 ‘둘레세계(Umwelt)’다.)

인간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어느 집단에 속할지는 결정권이 자신에게 100퍼센트 있는 건 아니지만, 아주 특수한 조건 속에 있는 게 아니라면, 자기가 고를 여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견딘다는 건, 늘 그렇지만, 어려운 일이다. 견디기 어려운 집단에 속해 있을 때, 사람은 서서히 미쳐간다. 어쨌건 이 경우조차 포함해서 인간은 집단 구성원으로 살며, 그 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생각과 판단이다. 이 점에서 내 생각이 내 생각만인 경우는 없다.

이 조건은 철학은 물론 정치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의미의 집단이 갖고 있는 ‘무의식’은 개인의 ‘의식’과 ‘이해관계’를 능가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 분석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사회를 둘러싼 논란들은 대부분 담론 집단 간 힘겨루기 양상을 갖고 있다. 여기서 옳고 그름이 문제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겉으로 내세우는 옳고 그름의 증거는 자기 집단이 믿고 싶은 선별적 증거일 뿐이었고, 이 상황에서 말싸움은 시원한 출구를 찾을 수 없다.

짧게 끝내도록 하겠다. 자기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지, 평소 누구와 주로 얘기하고 밥 먹는지 곰곰이 돌이켜보기 바란다. 그러면 자기 생각의 출처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바로 집단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내가 가끔 지적하는 ‘치명적’ 오독의 문제도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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