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005

자연과 산업

이제 인간과 자연의 구분을 분열자의 삶 속에서 해체하는 지점까지 왔는데요. 소제목으로 ‘자연과 산업’, 이렇게 달려있죠. 이번에는 인간 활동의 핵심에 속하는 ‘인공’적 측면 또는 ‘산업’의 측면을 재규정하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다 해체되었을 때, ‘모든 것이 다 기계다, 기계들의 기계다’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첫 문장입니다. “분열자의 산책 속편.” 사뮈엘 베케트의 《몰로이》에 나오는 구절들인데요. 베케트의 작품들도 들뢰즈에게는 늘 등장하니깐, 기회가 되면 작품을 보길 바라고요. 한글본 25쪽 중간쯤으로 내려갑니다. 원소 8쪽 맨 아래입니다. “하나의 결과가 주어진다면, 그 결과를 잘 생산할 수 있는 건 어떤 기계일까? 또한 하나의 기계가 주어진다면, 그걸 뭐에 써먹을 수 있을까?” 이게 사실 굉장히 중요한 물음인 거죠. 어떤 결과를 어떤 기계가 가장 잘 만들어 낼 것인가? 또 거꾸로 어떤 기계가 주어졌을 때 어떤 결과를 가장 잘 만들어 낼 것인가?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물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천적으로도 중요한 물음이고, 예술적으로도 중요한 물음입니다. 항상 결과와의 관계 속에서 기계 작동이라는 게 성립하니까요. “가령 식탁 나이프 받침에 대한 질서정연한 설명서 앞에서, 그것이 어떤 용도일지 짐작해 보라.” 그리고 베케트가 드는 다른 사례를 드는데요. 주머니에 돌을 넣으면 다른 주머니에서 뭐나 어떻게 되고 하는 이런 기계를 상정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여기서 쾌감(volupté)의 생산이란 어떤 걸까?” 즉, 어떤 쾌감이 생산될까? 이것은 느낌의 수준입니다.

‘쾌감’은 라틴어로 ‘볼룹타스(voluptas)’인데, 성적인 쾌감이라는 뜻이 가장 강하지만. 니체, 들뢰즈·과타리, 푸코에게 ‘성’적인 쾌감과 ‘신체, 몸’의 쾌감은 분리된 게 아닙니다. 몸(bodily)이 곧 성적(sexual)인 겁니다. 이런 쾌감의 생산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때 ‘쾌감’은 뒤에서도 설명되는데, 꼭 ‘즐거운 쾌(快)’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쾌감이라는 말로 지칭될 수 있는 범위(range) 전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즐거운 쾌부터 불쾌까지를 하나로 묶어서 다 ‘쾌’라고 할 수 있어요. 등급이 나뉠 뿐입니다. 가장 낮은 등급의 쾌는 불쾌, 고통이고, 가장 높은 등급의 쾌는 즐거움, 기쁨이죠. 향유, 프랑스어로 ‘주이상스(jouissance)’, 영어로 ‘인조이(enjoy)’라는 게 꼭 좋은 것을 누린다는 뜻이 아니라, 쾌감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느끼는 것도 쾌의 일종이에요. 물론 우리는 고통보다는 기쁨에 해당하는 쾌를 느끼고 싶어 하겠죠. 그러나 쾌의 범주, 쾌의 집합 안에 드는 어떤 느낌이 생산된다는 것만큼은 항상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이 뒤에서 나올 ‘세 번째 종합’의 특성입니다. 쾌가 발생한다는 거예요. 쾌의 등급이 좋건 나쁘건, 쾌가 발생할 때는 그 쾌를 느끼는 어떤 존재가 있게 됩니다. 그때마다 쾌감이 곡선을 그리며 변해가면(평면 좌표에서 x축을 따라 함수의 그래프가 변하는 걸 떠올려 보세요), 그 곡선을 따라가면서 쾌를 향유하는 존재가 계속 달라집니다. 계속 달라지면서 발생하고 존재합니다. 또는 그때그때 생겨나거나 생성합니다. 그게 들뢰즈·과타리적 의미의 주체입니다. 그러니까 주체는 고정된 채로 어떤 쾌를 일방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쾌감의 흐름이 주체를 발생시킵니다. 그렇게 뒤에서 얘기될 거예요.

과정

계속 이어지는데요. 이제 인간과 자연, 산업과 자연, 사회와 자연, 인공과 자연, 이 모든 구분이 ‘과정’이라는 말 속에 통합됩니다.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에서 ‘과정’은 ‘프로세쉬스(processus)’고, 영어로 ‘프로세스(process)’입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게, 몇 줄 아래 나오는데, 프랑스어에 또 ‘프로세(procès)’라는 단어가 있거든요. 이것도 영어로 ‘프로세스(process)’라고 번역하지만, 의미는 다릅니다. ‘프로세’는 과정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이건 법률적 의미로 ‘소송’이라는 뜻이 있어요. 일본에서는 문법 용어로 ‘사행(事行)’이라고 번역하기도 해요. 사행은 동사가 나타내는 동작·상태·상태의 변화를 총괄하는 개념입니다. 고민해 본 결과 ‘프로세’는 ‘경과(經過)’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소송이라는 뜻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소송은 끝나질 않아요. 계속 가죠. 질질 끄는 게 소송입니다. 참고로,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Der Prozess)도 같은 단어예요. 고민 끝에 ‘프로세’를 경과, 또는 운행, 이렇게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프랑스어에서 ‘경과’는 ‘과정’과 다르니까 주의해서 보시고요. 일본에서는 구분해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번역을 이상하게 했어요. 일단 ‘프로세쉬스’를 ‘프로세스(プロセス)’라고 번역했어요. 음차(音借)한 셈이죠. 그런데 ‘프로세’는 ‘과정(過程)’이라고 번역했어요. 차이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긴 한데, ‘프로세스’와 ‘과정’이 어떤 차이가 느껴지는지는 모르겠어요. 독일어와 영어는 둘을 같은 말로, 즉 ‘프로체스(Prozeß)’와 ‘프로세스(process)’로 옮겼는데,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이처럼 프랑스어로 구분되는 두 단어가 영어 혹은 독일어로 한 단어로 옮겨진 예가 몇 있어요. 이것들이 아주 중요한 용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번역만으로는 뉘앙스의 차이, 의미의 차이를 읽어내는 게 불가능한 거예요. 일본어 번역은 들뢰즈의 제자인 우노 구니이치(宇野 邦一)가 옮겼어요. 용어의 차이에는 주목했는데, 그게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앞에서 보았듯, 좀 인위적인 면도 보입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또 언급하게 될 거예요. 지금 소절 제목은 ‘프로세쉬스’, 즉 ‘과정’입니다. 같은 문단에서 몇 줄 내려가면 ‘경과’라는 용어도 등장하지만요.

첫 문장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분열증의 한 극(極)으로 고정할 마음은 없다.” 이 말은 뭐냐면, ‘자연만이 분열증적이다, 생산적이다. 그리고 다른 쪽, 즉 인간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할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분열자가 특유하게 유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결코 자연이라는 특유한 극이 아니라 […]” ‘특유한’은 spécifique(프), specific(영)을 번역한 건데요. 다른 번역도 가능하겠지만, 그 말의 명사형인 espèce(프), species(영)가 생물학에서의 ‘유(類)’라는 뜻이라는 점에서, 이런 측면을 ‘특유’라는 말이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분은 ‘종별(種別’이라고 옮기는데, 그 말은 좀 낯설고, ‘종’하고 ‘별’로 나뉜다고 하는데 그 정도까지는 번역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그래서 ‘특유’라고 했습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분열자가 특유하게 그리고 유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결코 자연이라는 특유한 극이 아니라 생산과정으로서의 자연이다. 여기서 과정이란 무슨 뜻일까?” 뒤에 세 가지가 언급됩니다. “어떤 층위에서, 자연이 산업과 구별되는 일은 있을 법하다. 한편으로 산업은 자연과 대립되며, 다른 한편 산업은 자연에서 원료를 퍼 오며, 또 다른 한편 산업은 자연에 폐기물을 반환한다 등. ‘인간과 자연’, ‘산업과 자연’, ‘사회와 자연’이라는 이런 구별 관계는, 심지어 사회 안에서 <생산>, <분배>, <소비>라 불리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들을 구별하는 조건을 이룬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자연과 산업이 구분될 수 있다고 할 때 얘기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층위에서의 구별들은, 그 발전된 형식적 구조 속에서 고찰하자면, (맑스가 지적했듯이) 자본과 분업을 전제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존재가 자신에 대해 그리고 경과(經過) 전반의 응고된 요소들에 대해 필연적으로 갖는 허위의식 또한 전제한다.” 여기서 ‘경과 전반의 응고된 요소들’이 뭐냐면, 자연의 경과 전반에서 우리가 인위적으로 쪼갰다는 겁니다. 우리가 생산, 분배, 소비로 쪼갰는데, 뒤에 바로 언급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것들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겁니다.

좀 더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건너뛰고요…] 상대적으로 독립된 영역들 내지 회로들이란 없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독립된 영역 내지 회로는 ‘생산, 분배, 소비’ 들인데요. “생산은 즉각 소비이며 등록이고, 등록과 소비는 직접 생산을 규정하며, 그것도 생산 자체의 한가운데서 생산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생산이다. 생산의 생산, 즉 능동들과 수동들의 생산들. 등록의 생산, 즉 분배들과 좌표들의 생산들. 소비의 생산, 즉 쾌감들, 불안들, 고통들의 생산들. 모든 것은 생산이기에, 등록들은 즉각 완수되고 소비되며, 소비들은 직접 재생산된다.” 방금 읽은 몇 줄은 생산이 전부이고, 그 생산을 셋으로 구별했을 때, 하위 항목으로서의 생산, 등록, 소비가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큰 지형도를 그릴 때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세목들, ‘생산의 생산’이 가리키는 게 뭐냐, ‘능동들과 수동들의 생산들’, 그리고 ‘등록의 생산’이 뭐냐, ‘분배들과 좌표들의 생산들’, ‘소비의 생산’이 뭐냐, ‘쾌감들, 불안들, 고통들의 생산들’이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생산이란 게, 사실상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그런 의미에서 존재론과 관련을 맺고 있다면, 여기서 등장하는 용어들, ‘능동, 수동, 분배, 좌표, 쾌감, 불안, 고통’, 이런 것들이 들뢰즈·과타리의 사적이고 자의적인 용어가 아니라 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용어일 수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죠. 예를 들어 스토아학파의 ‘물체(soma, corps, body)’가 관계를 맺는 방식은 ‘능동과 수동’밖에 없습니다. 또 스피노자에서도 ‘물체(corpus, corps, body)’ 또는 ‘몸’이 맺는 관계도 ‘능동과 수동’밖에 없습니다. 물리적(physical)으로 기본 입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맺는 관계는 ‘능동과 수동’의 관계입니다. 가하거나 당하거나. 니체에서도 유사합니다. 니체에서는 ‘능동과 수동’이라는 말보다 ‘작용(active, 능동)과 반작용(reactive, 반응)’이라는 말을 더 쓰지만요. 결국 그런 것들이 다 들뢰즈·과타리가 말하는 이 개념들 안에서 집약된다고 얘기할 수 있고요. 가령 들뢰즈가 스토아학파 얘기할 때, 심층에서 일어나는 능동 및 수동과 표층에서 일어나는 효과들, 결과들을 구분하면서, 표층에서 일어나는 결과들에 대해 ‘의미’라든지 ‘사건’이라든지, 이런 말을 붙이는 데, 그게 바로 소비의 생산에 해당하는 ‘쾌감들, 고통들, 불안들’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연구했던, 철학사 전체에 등장했던, 그 많은 내용들이 이 생산의 세 종합, 또는 생산의 세 분류, 이 안에 다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저게 사소한 진술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과정의 첫째 의미는 이렇다. 등록과 소비를 생산 자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등록과 소비를 단 하나의 동일한 경과의 생산들로 만드는 것.” 생산이 일어나면서 동시에 등록과 소비도 일어난다, 즉 생산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뒤에서 자세히 분류가 이루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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