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현상학은 무의식을 다루지 못한다
현상학은 현대철학의 주요 흐름 중에서도 중심에 자리한다. 대체로 에드문트 후설에서 시작해서, 독일에서는 하이데거로 이어졌고 프랑스에선 레비나스,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로 이어졌으며, 최근의 ‘신유물론’ 계통 학자들도 현상학을 주요 원천으로 삼고 있다.
현상학은 ‘의식’을 중심에 두고 있다. 후설은 의식은 ‘무언가에 관한 의식’이라고 보았고, 이를 의식의 ‘지향성’이라 한다. 지향성(Intensionalitat)이란 ‘~를 향하고 있는 특성’이다. 이 관계를 지칭하기 위해 만든 용어가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다.
노에시스는 희랍어 noēsis에서 유해했으며, ‘생각하다’라는 뜻의 ‘노에인(noein)’에서 왔고, 노에인은 다시 ‘마음, 지성, 생각’을 뜻하는 ‘누스(nous)’에서 왔다. 노에인의 수동과거분사가 noēma이며, ‘생각된 것, 지각된 것’을 뜻한다.
후설은 생각된 것(노에마)은 생각활동(노에시스)와 쌍을 이룬다고 보았고, 이를 통해 ‘생각된 것’이 명증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생각작용이 바로 생각된 것을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즉, 생각된 것은 생각된 것의 ‘나와바리’ 안에 있으니 명증하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이라고 말한 것은 현상학에서는 ‘의식’이다. 말하자면, 생각의 범위를 의식으로 좁혔다고 해야 한다.
이제 ‘생각=의식’이 성립하느냐를 물어볼 수 있다.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베르그손 같은 19세기 중반 ~ 20세기 초에 활동한 사상가들이 잘 밝힌 것처럼 생각은 의식보다 넓다. 즉 ‘생각 > 의식’이다. 그리고 의식에 속하지 않는 생각의 영역, 즉 의식의 여집합이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명사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정관사와 형용사를 결합한 말이다. 독일어 das Unbewußte, 프랑스어 l’inconscient, 영어 the unconscious 같은 식의 조어다.
의식이 무엇인지 학문 영역마다 또 학자마다 규정이 다르다. 대체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점은, 의식은 곧 ‘자의식(self-consciousness)’, ‘자각(self-awareness)’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식은 자신이 어떠한지 돌아보는 활동이며, 이 점에서 ‘메타 인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무의식이 무엇인지 규정하자면, 자기가 돌아보지 못하는 자기 내부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고, 이 지점에서 ‘생각’의 영역을 넘어 ‘몸’과 ‘물질’ 영역으로 확장할 여지가 생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것을 ‘언어’를 경유해 의식의 영역에 가두었다. 들뢰즈·과타리가 프로이트와 라캉을 비판하는 핵심이 여기 있다. 무의식은 도식화할 수 없다.
현상학으로 돌아오자. 현상학은 의식에 갇혀 있다. 후설과 그 후배들도 모두 그러하다. 아닌 측면이 있다는 점은 반론의 논거가 되기 어렵다. 철학이라면 중핵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나는 현상학 계보에 있는 모든 철학을 권하고 싶지 않다. 처음부터 무의식을 직접 다루는 편이 더 넓고 유익하고 명료하기 때문이다. 듣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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