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논란을 일으킬 수도 있을 내용을 포스팅합니다. 김훈은 소설과 산문에서 넓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글쟁이입니다. (돌 날아오는 게 보이네요.) 그런 김훈을 제가 비판해 보았습니다.
나는 김훈을 좋아하지 않는다. 문장을 못 써서다. 김훈은 과도한 수사로 사태를 명료하게 보지 못하게 만드는 기이한 재주가 있다. 김훈에 대해 문장가, 미문 등의 수식을 붙이는 경우를 많은 보았는데,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 물음을 제쳐두고 서사(이야기)만을 중시하는 풍토를 반영하는 세태일 뿐이라고 판단한다. 무릇 좋은 글이라면, 서술하는 바가 맑고 또렷해야 한다. 이게 기본이다. 그런데 김훈이 그려 보이는 세계는 흐릿하다. 그가 제시하는 세계는 그런 점에서 해악이며, 예술에 값하지 못한다. 조정래와 더불어 문장이 성립하지 않는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김훈이며, 부당하게 고평가된 이가 바로 김훈이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데는 언론계와 문단의 연고주의가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들 뿐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김훈의 소설을 단 한 편도 완독하지 않았다. 문장을 따라가기 어려운데 어찌 참고 읽으라는 말인가. 그렇다고 그의 글을 비평할 자격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여러 형식으로 글을 썼고(신문 기사도 있고, 좀 다른 형식이지만 인터뷰도 많다), 소설의 일부가 심지어 대입 논술 제시문으로 실리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김훈의 글을 읽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그의 거의 모든 글들이 글을 참 못 쓴다는 사실을 환기했을 뿐이지만.
아래는 소설 《남한산성》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칸은 조선 임금에게 국서를 보내어, 명의 연호를 버리고 명에 대한 사대를 청으로 바꿀 것과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 군신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머리를 길게 땋고 양가죽 옷을 걸친 사신이 호위 군사를 부려서 칸의 국서를 수레 위에 받들어 왔다. 칸의 문장은 거침없고 꾸밈이 없었으며, 창으로 범을 찌르듯 달려들었다. 그 문장은 번뜩이는 눈매에서 나온 듯했다.”
마지막 세 문장을 다시 보자. “칸의 문장은 거침없고 꾸밈이 없었으며, 창으로 범을 찌르듯 달려들었다. 그 문장은 번뜩이는 눈매에서 나온 듯했다.” 나는 이 비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얼개를 보면 “칸의 문장”은 (아마도 조선 임금에게) “달려들었다”는 건데, 그 방식은 “창으로 범을 찌르듯”하다는 거다. 나아가 칸의 문장은 “번뜩이는 눈매”에서 나온 듯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칸의) “번뜩이는 눈매”에서 나온 “칸의 문장”은 “창”(아마도 문장을 가리킬 게다)으로 “범”(아마도 조선 임금일 게다)을 찌르듯 (조선 임금에게) “달려들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조선 임금을 범에 빗대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칸의 입장에서 조선 임금이 범으로 보였을까? 그리고 일반적으로, 창으로 범을 찌를 때는 사력을 다해야 하거늘, 마치 아무 두려움도 조심성도 없이 찌르는 듯한 행동은 칸의 기본 자세에 어울리지 않는다. 요컨대 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대목은 말이 되지 않는다.
글은 생각의 창이다. 내가 들여다 본 김훈의 생각은 흐릿하고 모호하다. 모호함 속에서는 많은 것들이 공모하고 타협한다. 그래서 가령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이 그에게 주었다는 크나큰 절망감은 그 모호함에서 나온 게 아닐까? 그가 일관되게 보여준 삶의 보수성은 문장의 모호함과 얽혀 있는 게 아닐까? 냉철하지 못한 김훈의 문장에서 우리 사회의 묵은 퇴행성을 느끼는 건 내 병의 징후일까, 아니면 내 건강의 징후일까.
- 첨언. 아래는 《 칼의 노래》 내부의 서사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비평문의 기사화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문체에 대한 분석은 아니지만 참고하기 바란다.
- 김훈 소설 ‘칼의 노래’ “소설속 시간 흐름 엉망”(우상균 기자, 중앙일보 2002.05.16)
이교수가 제기하는 문제는 소설 일부분에서 “계절이 뒤죽박죽이라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소설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서사에 있어 치밀함과 정확성의 부족을 지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다음 사건을 서술할 때 과거가 들어맞지 않는 데 있다는 것. “구례에 도착하던 밤에 혼자 술을 마셨다.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떠올랐다. 두 달이 지났으니, 어머니는 땅 속에서 썩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취했다. 허리가 결리면서, 비가 내렸다. 차가운 늦가을 비였다.”(소설 중)
그러나 소설에는 또한 의금부에서 풀려나 남하하던 4월 중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는 것으로 돼 있다. 모친상 당한 때가 4월 중이니, 구례에 도착해 두 달 전 숨진 어머니를 회상한다면 6월이 돼야하는데 구례 도착은 이미 7월이 지난 시점이다.
이교수는 또 작가가 계산을 다시해 두 달 뒤가 아니라 ‘넉달 뒤’라고 표현했어도 여전히 여름철인 8월이니 늦가을 비라 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교수는 “사실(史實)과 소설이 같고 다른가를 밝히는 게 아니라 온전히 소설 자체로서 전후 서술의 모순을 문제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사례분석은 정유년 8월 말에 벽파진으로 진을 옮긴 시기, 정유년 겨울에 전선(戰船)을 준비한 일, 무술년 봄 수영을 고금도 덕동포구로 옮긴 시점 등 세 부분으로 이어진다. 또 포로의 숫자가 16명에서 17명으로 바뀐 사례 등도 지적하고 있다.
“이번 대선결과에 대해 50대 이후 세대들이 충격을 받은 것 같더라구요”
“저(=김훈)도 충격을 받았습니다”이때만 해도 저는 이말에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김 선배가 받은 그 ‘충격’이 바로 김 선배가 ‘한겨레’를 떠난 이유입니다.
위 기사를 마감한 그날 저녁 김 선배가 제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컬럼을 한 번 써도 괜찮겠습니까?”
“예, 좋습니다. 어떤 내용이지요?”
“저는 노무현을 찍지 않았습니다. 이회창을 찍었습니다”
“그러셨나요?”
“제가 왜 노무현을 찍지 않았는지, 왜 이회창을 찍었는지를 <한겨레> 지면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결과가 아니라 이제 자신 세대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하시나봐요. 그런데 (김 선배 특유의) 횡설수설해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몸도 좀 안 좋으신 것 같고”
(2018.3 마지막 수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