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점들을 유념하면서 ‘분열자’에 관한 얘기로 넘어갑니다. ‘정신병’ 혹은 ‘정신분열증’이라고도 하지요. 요즘은 ‘조현병’이라고 순화해서 쓰는데, 들뢰즈·과타리는 분열증을 ‘병’으로 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조현병’도 적절하진 않습니다. 분열증이 ‘병’이 아니라는 점은 뒤에서 설명될 겁니다.
분열자가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전까지 정신분석의 분석 대상은 ‘신경증자’, 노이로제 즉 신경증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프로이트는 분열자를 혐오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들뢰즈·과타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분열자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인지를 이어지는 둘째 문단에서 보여주려 합니다. 원서 7~8쪽에 걸쳐 있습니다. 렌츠라는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분열자의 산책. 이것은 소파에 누운 신경증자보다 나은 모델이다. 약간의 외기, 바깥과의 관계. 가령 뷔히너가 재구성한 렌츠의 산책. 이때의 렌츠는 그의 선한 목사 집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다행히 게오르크 뷔히너(Georg Büchner)의 《렌츠》라는 작품도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렌츠는 실존 인물이고, 그를 짤막한 단편으로 일종의 전기처럼 일화를 적어놓은 작품입니다. 《뷔히너 전집》에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관련된 구절이 나옵니다. 특징이 뭐냐를 봐야 하는데요. “이 목사는 종교의 신과 관련해서, 부모와 관련해서 렌츠의 사회적 위치를 억지로 지정한다.” 목사의 집에서는 굉장히 오이디푸스적입니다. “반면 산책할 때 렌츠는 다른 신들과 함께 또는 전혀 신 없이, 가족 없이, 부모 없이, 자연과 함께 산속에, 눈 속에 있다. <아버진 뭘 바라지? 아버지가 내게 더 좋은 걸 줄 수 있을까? 불가능해. 날 평화롭게 내버려 둬.>” 목사의 집에 있을 때와 산책할 때 렌츠는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다음 부분이 흥미로운데요. 이 대목 역시 책 전체의 요약입니다. “모든 것은 기계를 이룬다.” 이때 ‘모든 것’에는 렌츠하고 렌츠가 산책하는 자연이 다 포함됩니다. “별들이나 무지개 같은 천상 기계들, 알프스 기계들, 이것들은 렌츠의 몸의 기계들과 짝짓는다.” ‘짝짓기’는 아까 말씀드렸죠. 들뢰즈·과타리가 책 맨 앞에 수록한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린드너의 ‘소년과 기계(Boy with Machine)’도 ‘짝짓기’를 보여주었지요. 자연과 인공의 구분이 사라지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인체, 사람의 몸과 사람을 둘러싼 다른 것들이 짝지어지고 연결되는 상황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다음엔 《렌츠》 원문의 인용입니다. “<온갖 형태의 깊은 삶과 접촉하는 것, 돌들, 금속들, 물, 식물들과 영혼을 교감하는 것, 달이 차고 기욺에 따라 꽃들이 공기를 빨아들이듯 꿈에 잠겨 자연의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것, 렌츠는 이런 것들이 무한한 지복의 느낌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인용된 부분은 뷔히너가 재구성한 렌츠의 말하자면 ‘심리상태’입니다. 그런데 렌츠는 흔히 말하듯 ‘자연과 합일’되어 ‘무아’의 경지, ‘몰아’의 경지에 이른 존재입니다. 여기에 다른 요소들이 개입할 일은 없죠. 그런데 렌츠는 산책을 중지시키는 순간 병자가 됩니다. 거기에 핵심이 있는 거죠. 그렇기에 분열자는 ‘분열증적 과정’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병원에 있는 무기력한 임상적인 존재인 환자로 위치하게 됩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하나의 엽록소 기계 내지 광합성 기계이기, 또는 적어도 이와 유사한 기계들 속에 자기 몸을 하나의 부품으로 슬며시 밀어 넣기.” 자연 한가운데를 산책하면서 우리 자신이 하나의 부품으로 자연에 슬며시 끼어드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렌츠는 인간과 자연의 구별보다 앞서, 이 구별이 설정한 모든 좌표보다 앞서 자리해 있다. 그는 자연을 자연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으로 산다.” 이 문장에서 ‘자연을 자연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의 두 번째 자연은 인간과 자연이 구분 속에서의 자연을 뜻합니다. 그러나 생산과정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과 자연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죠. “더 이상 인간도 자연도 없다. 오로지 하나 속에서 다른 하나를 생산하고 기계들을 짝짓는 과정만이 있다.” 이 부분에서는 렌츠에서 시작했지만,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파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통은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파기될 때, 그 인간을 ‘미친놈’이라고 부르게 되죠. 온통 그 구별 아래에서만 사회가 성립하고 이른바 인간이라는 게 성립하니까요. 그러나 여기서 분열자의 삶 그 자체는 자연과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전통적인 의미의 자연주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면 여기서는 다시 기계나 산업 같은 주제들이 개입하게 되니까요.
좀 더 가볼게요. “도처에 생산적 즉 욕망적 기계들, 분열증적 기계들, 유적(類的) 삶 전체로다. 자아와 비-자아, 외부와 내부의 구별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문장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요. 왜 그러냐면, ‘생산적’, ‘욕망적’, ‘분열증적’, 이게 모두 동의어로 표기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같은 층위에 놓여요. 원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partout des machines productrices ou désirantes, les machines schizophrènes.” 영어 번역에는 이렇죠. “producing-machines, desiring-machines everywhere, schizophrenic machines.” 프랑스어와 영어가 조금 다릅니다. 순서를 맞추면 이렇게 될 겁니다. “everywhere producing or desiring machines, schizophrenic machines.” 그래서 이 세 가지 말은, ‘생산적, 욕망적, 분열증적’이라는 말은 다 같은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욕망적’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마련됩니다. 그건 ‘생산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른 강좌에서 얘기했지만, 이때 ‘생산한다’는 말은 ‘창조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때 ‘생산한다, 창조한다’는 다른 뜻이 아니라,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이해되는 생산, ‘크레아티오 엑스 니힐로(creatio ex nihilo)’, 무(無)에서부터의 생산이 전혀 아니고, 희랍 전통에서의 생산, ‘크레아티오 인 시투(creatio in situ)’, 상황 안에서의 생산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생산적 기계’라고 할 때, 생산한다는 말은, 있는 재료를 가지고 생산한다는 말입니다. 그 얘기는, 있는 재료로 변형시키고 재조합하고 조립하고 등등 이런 뜻이지, 뽕하고 뭔가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욕망한다는 말의 의미도 마찬가지죠. 욕망한다는 것은, 뭔가 없는 것을, 결핍한 것을 내가 획득한다는 게 아니라, 이게 뒤에서 더 강하게 얘기되겠지만, 있는 것들을 가지고, 결국은 재료, 부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들을 새롭게 배열하고 조립하고 조직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다 욕망한다는 말의 일차적인 뜻입니다. 분열증자도 마찬가지예요. 분열적이라는 말은 쪼갠다는 뜻이 있지만, 동시에 쪼갠다는 것은 부품으로, 재료로 환원한다는 뜻이고, 아까 얘기한 횡단한다는 말이 그건데, 그렇게 해서 주어진 것을 갖고 다시 조립한다는 뜻이 항상 함께 갑니다. 우주에서의 그런 작용 일반을 ‘삶’이라고 부릅니다. ‘vie, life’가 그거예요. 이때 ‘유적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래는 맑스에서 유래한 용어이기는 한데, 이 경우에는 얘기가 길어지니깐 짤막하게 하자면, 기계도 사는 거고, 인간도 사는 거고, 자연물들도 사는 거라는 뜻입니다(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Jae-Yin Kim (2013), “Deleuze, Marx and Non-human Sex: An Immanent Ontology Shared between Anti-Oedipus and Manuscripts from 1844” , Theory and Event, 16(3); 김재인(2013),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우주적 삶(cosmic life 또는 cosmic force), 이걸 다른 말로 불렀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우주의 존재는 모두 생산 중에 있어요. 생산의 과정에 있습니다. 그것을 총칭해서 삶이라고 부르는 거죠. 나중에 《천 개의 고원》에 가면 ‘마시니즘(machinisme)’이라고 부릅니다. ‘범기계주의’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게 기계라는 거죠. ‘추상적인 기계(abstract machine)’라는 말을 쓸 때도 그 기계는 삶과 관련 있습니다. ‘추상적인 기계’의 동의어로 ‘추상적인 동물’이라고 아주 가까운 대목에서 얘기합니다. abstract animal과 abstract machine은 같은 뜻이에요. 그게 바로 여기서 말한 ‘유적 삶’하고 같은 뜻입니다. 다음 소절로 계속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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