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과타리가 말하는 a people은 ‘민중’이 아니라 ‘민족’이다

들뢰즈·과타리가 말하는 ‘un peuple / ein Volk / a people’은 결코 ‘민중(民衆)’이 아니다. 민중의 정의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로, 보통 피지배층을 이루는 노동자, 농민 등을 이르는 말’이라는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이라는 풀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197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그런 의미로 사용해왔던 건 분명하다. 민중이 이런 뜻이라면, 들뢰즈과타리는 민중을 말하지 않는다. 들뢰즈·과타리가 염두에 두는 건 프리드리히 니체, 프란츠 카프카, 파울 클레가 규정한 의미다.

《천 개의 고원》에 두 번이나 인용된 클레의 구절을 보자(끝에 있는 한글 번역만 봐도 됨). 두 번째 등장한 대목을 위주로 보면 다음과 같다. “Wir haben noch nicht diese letzte Kraft, denn: uns trägt kein Volk. Aber wir suchen ein Volk.”(p. 460, 518) 이 독일어 원문을 프랑스어와 영어는 각각 다음처럼 옮겼다. “il nous manque cette dernière force, faute d’un peuple qui nous porte. Nous cherchons ce soutien populaire.”(MP 406, 467) “We are lacking that final force, in the absence of a people to bear us. We are looking for that popular support.”(ATP 337~338, 377; 영어본 오역은 수정) 이걸 한국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 마지막 힘이 아직 없다. 우리를 받쳐줄 민족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민족을 찾고 있다.” 방금 옮겼듯이, 들뢰즈·과타리가 말하는 것은 특정한 성격을 갖고 있는 ‘민족’인데,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아직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도래할 민족’이라고 칭하곤 한다.

이렇게 옮겨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들뢰즈·과타리가 ‘un peuple / ein Volk / a people’와 별개로 부정관사 없이 ‘peuple / Volk / people’을, 그것도 아주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때는 ‘인민, 민중’이라는 의미다. 시민권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 없이 사용하는 ‘불특정 사람들의 모임’ 정도의 뜻이다.

그렇다면 ‘도래할 민족’은 왜 굳이 ‘민족’으로 옮기는가? 민족 혹은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이 예민한 쟁점과 관련해서는, 들뢰즈·과타리의 논의를 우회해서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논의를 참조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앤더슨의 ‘민족’ 혹은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내가 살펴본 바 있다(《상상된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보급에 대한 고찰》, 서지원 역, 도서출판길, 2018).

“앤더슨은 당시 끈질기게 관찰되던 민족주의라는 이상 현상(anomaly)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나아가 보수주의까지도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을 개탄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정신으로” 관점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민족됨(nation-ness)은 실로 우리 시대의 정치적 삶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정당성을 띠는 가치”다. 앤더슨에 따르면 민족의 특징은 네 가지다. 상상, 제한성, 주권, 공동체. “민족은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로서, 본성적으로 제한적이며 주권을 지닌 것으로 상상된다.”(25쪽)

이 정의에서 가장 오해가 많은 개념인 ‘상상’은 ‘허위’나 ‘날조’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며, 오히려 ‘발명’과 ‘창조’라는 의미다. 앤더슨은 그 점에 대해 이렇게 강조한다. “사실 대면 접촉으로 이루어진 원초적인 촌락보다 (어쩌면 이것마저도) 큰 공동체는 전부 상상된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가짜인지 진짜인지가 아니라, 어떠한 스타일로 상상되었는지를 기준으로 구별해야 한다.”(26-27쪽) 한편 ‘제한성’이란 민족이 유한한 규모고,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있다는 식으로 상상된다는 점을 뜻한다. 또한 ‘주권’은 민족의 독립성과 자유를 표상한다. 끝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되며, 언제나 “수평적 동지애”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요컨대 민족은 외부 관찰자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판정되는 것이 아니며, 운명 공동체로서 “민족 구성원들의 수평적인 동지애 위에 세워진, 주권을 가진 정치 공동체를 향한 ‘상상’이라는 정치적 행위”(351쪽)인 것이다.

(중략)

한편 앤더슨의 논의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민족의 구성이 식민주의에 대한 응전으로 생겨났다는 점이다. 아메리카 남쪽과 북쪽의 식민지에서 자신들이 꿈꾸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바람이 최초의 민족들을 형성한 원동력이었다. 이는 계몽주의 이후 많은 서양 근대 사상가들이 놓치고 있던 논점이기도 하다. 민족이 탈식민주의 운동의 산물이라는 점은 민족의 탈근대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김재인, 《뉴노멀의 철학》, 동아시아, 2020, 62-62쪽)

앤더슨의 관찰과 주장은, (1) 상상이란 가치를 공유하게 만드는 구성적 역량이며(이는 스피노자의 주장과 조응한다), (2) 민족을 구성하는 운동인 민족주의는 일차적으로 식민주의에 대한 대항으로 성립했고, 그것이 역으로 유럽에 유입되어 19세기~20세기에 관찰된, 역사를 불행으로 채운 서양 민족주의로 변질되었다는 논점에서 극에 달한다.

나는 들뢰즈·과타리가 말하는 ‘un peuple / ein Volk / a people’이, 용어는 조금 다를지라도, 앤더슨이 말한 ‘nation’에 대응한다고 해석한다. 한편, ‘민족(民族)’이라는 용어는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 1909년 5월 28일 자 논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에서 사용한 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뉴노멀의 철학》 68쪽에서 논한 바 있으니 참하기 바란다. 신채호는 ‘민족’과 ‘민족주의’를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의 발로로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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