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한국인이 니체와 불교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나는 이런 식의 ‘유사성’ 언급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꼭 필요한 논증과 설명이 생략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냥 ‘느낌상’ 그렇다는 걸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아래에 니체와 불교의 관계에 대한 두 개의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 “니체가 부처와 불교에 대해 체계적인 지식을 얻은 것은 조금 더 후인 1884년 무렵으로 생각된다. 이 해 가을, 그는 김나지움 이래의 오랜 벗으로 인도학자의 길을 걷오 있던 P. 도이센의 《베단타의 체계》(1883)와 H. 올덴베르크(Hermann Oldenberg, 1854-1920)의 《부처, 그의 생애와 가르침과 교단》(1881)을 읽고, 몇 개의 메모를 남기고 있다. 특히 후자는 부처와 원시 불교의 사상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독일에 소개한 저서였다. (중략) 이와 같이 니체의 불교에 관한 발언은 그리스도교를 비판, 공격하기 위한 반증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다. 부처 및 불교에 대한 해석이 과녁을 맞히고 있는 곳도 있지만, 어쨌든 니체가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의 그저 일면일 뿐인바, 중국과 일본에서 전개된 대승불교와 그것의 ‘색즉시공’의 신묘한 세계에 대해서는 예감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정하게 보아 그 많은 것이 초점을 벗어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소노타 무네토, ‘부처’ 항목, 《니체사전》(1995), 이신철 옮김, 도서출판b, pp. 262-263)
요컨대 니체의 불교에 대한 지식은,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최소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를 쓴 1883년까지 별 게 없었고, 따라서 불교는 ‘영원회귀’ 사상이나 ‘운명애’와도 전혀 상관이 없고, 뭔가 불교의 심오한 사상과 니체 사이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건 각기 독자적으로 서로 다른 맥락에서 탐구된 성과이며, 니체가 불교에서 영향 받은 건 전혀 없다.
다음 또한 참조할 것. (내가 독일어에서 번역한 것임)
- “불교에 대한 니체의 지식은, 니체가 읽은 원전들에 따르면, 일차적으로 후기의 대승불교나 선불교보다는 소승불교에 가까운 초기 역사적 불교를 참조하고 있다. 결국 몇몇 니체 연구자들은 이 후기 형식들[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 불교에 대한 니체의 좀 더 긍정적인 참조점을 보는데, 왜냐하면 불교 역시도 발전했으며 오래된 형식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가 니힐리즘적 종교로서의 불교라는 일반적 평가를 거두었는지 여부는 문젯거리로 남아 있는데, 특히 “무릇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 형식”(EH, Za 1)으로서의 ‘같은 것의 영원회귀’라는 니체 사상의 평가 기준을 따른다면 말이다. 심지어 니체가 “불교의 유럽적 형식”이라고 부른 “니힐리즘의 극단적 형식”(NF 1886-87, 5[71], KSA 213쪽)마저도 이중의 의미를 갖는데, 그건 약함의 기호일 수도 정신의 고양된 권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원문
“Nietzsches Kenntnisse des Buddhismus beziehen sich, seinen Quellen zufolge, in erster Linie auf den älteren und dem historische Buddha näher stehenden Theravada- (bzw. Hinayana-) Buddhismus, weniger auf den späteren Mahayana- oder gar Zen-Buddhismus. Dennnoch sehen einige Nietzsche-Forscher gerade in diesen späteren Formen die eher positiven Bezugspunkte Nietzsches zum Buddhismus, da sich in ihnen auch der Buddhismus weiterentwickelt und über seine ältere Gestalt hinausgegangen ist. Ob Nietzsche dadurch von seiner generellen Einschätzung des Buddhismus als einer nihilistishen Religion abgekommen wäre, bleibt jedoch fraglich, wenn man den Maßstab solcher Beurteilung in Nietzsches Gedanken der ewigen Wiederkunft des Gleichen als der “höchste[n] Formel der Bejahung, die überhaupt erreicht werden kann” (EH, Za 1), sieht. Selbst “die extremste Form des Nihilismus”, die Nietzsche die “Europäische Form des Buddhismus” nennt (NF 1886-87, 5[71], S. 213), ist zweideutig und kann ein Zeichen der Schwäche oder der gesteigerten Macht des Geistes sein.” (Michael Skowron, “Buddhismus”, in Christian Niemeyer (ed.), Nietzsche-Lexikon, 2009, p. 55)
(2018.03. 마지막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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