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가 타르드를 처음 소개한 건 《차이와 반복》(1968)에서였지만, 미시사회학과 관련해서 본격적으로 논한 건 《천 개의 고원》(1980)에 와서다. 크게 두 군데서 타르드를 요약하고 의의를 평가하는데, 그 부분을 다시 번역했다.
원서 264쪽:
프랑스의 68년 5월은 분자적이었고, 거시정치의 관점에서는 그 조건은 더더욱 지각 불가능했다. 이리하여 가장 진보적인 혹은 조직의 관점에서 자신을 가장 진보적이라고 믿는 정치인들보다 아주 편협하거나 아주 나이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을 더 잘 파악하는 일이 벌어졌다.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가 말했듯 어떤 농민이, 그리고 남 프랑스의 어떤 지역에서, 이웃 지주에게 인사하지 않기 시작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시대에 뒤진 아주 나이 많은 지주가 현대주의자보다 사태를 더 잘 평가할 수 있다. 68년 5월도 똑같다. 거시-정치의 견지에서 판단한 모든 사람은 그 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할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도주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 정당들, 조합들, 많은 좌파들은 그 점을 크게 원통해 했다. 이들은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마치 이들을 유효한 교섭 상대로 만들어주는 모든 전투 기계를 일시적으로 빼앗기기라도 한 것 같았다. 기이하게도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드골, 심지어 퐁피두가 더 많이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의 분자적 흐름이 새어 나와, 처음에는 작게 그다음엔 할당할 수 없이 커졌다……. 하지만 그 역도 진실이다. 분자적 도주들과 운동들도 그램분자적 조직들을 다시 통과해 이런 조직들의 절편들과 이런 조직들의 성, 계급, 정당의 이항 분배들을 개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원서 267~8쪽:
가브리엘 타르드(1843∼1904년)에게 경의를. 오랜 동안 잊혔던 그의 작업은 미국 사회학, 특히 미시사회학의 영향 아래에서 현행성을 되찾았다. 타르드는 (퀴비에와 조프루아 생틸레르의 논쟁처럼 격렬하고 같은 종류인 논쟁에서) 뒤르켐과 뒤르켐 학파에 의해 으깨졌었다. 뒤르켐은 일반적으로 이항적이고 공명하고 초코드화된 거대한 집단 표상들에서 특권화된 대상을 찾았던 것이다……. 타르드는 집단 표상들은 설명해야만 하는 것, 즉 “수백만 명의 인간들의 유사성”을 전제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 때문에 타르드는 오히려 세부의 세계 혹은 무한소의 세계, 즉 표상 아래의 질료를 구성하는 작은 모방들, 대립들, 발명들에 관심을 가졌다. 타르드의 책에서 가장 뛰어난 구절들은 관료제나 언어학 등에서 이루어진 미세한 혁신을 분석한 대목이다. 뒤르켐주의자들은 그건 심리학이나 사이-심리학일 수는 있어도 사회학과는 무관하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이런 응수는 겉보기에만, 최초의 어림짐작으로만 진실이다. 미시-모방은 한 개인에서 다른 개인으로 가는 것 같다. 동시에, 그리고 더 심층적으로는, 미시-모방은 개인이 아니라 흐름이나 파동과 관련된다. 모방이란 흐름의 전파다. 대립이란 흐름의 이항화, 이원화다. 발명이란 잡다한 흐름의 결합 혹은 연결이다. 그러면 타르드에게서 흐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 또는 욕망(모든 배치체의 두 양상)이다. 하나의 흐름은 항상 믿음과 욕망의 흐름이다. 믿음들과 욕망들은 모든 사회의 바탕이다. 그것들은 흐름이며, 그렇기에 “양화 가능”하며, 진정한 사회적 <양>인 반면, 감각은 질적이고, 표상은 단순한 결과물이다.(주석: 타르드에 따르면 심리학은 양적이다. 단, 그것이 감각 안에 있는 욕망과 믿음의 성분들을 연구하는 한에서 그렇다. 또 논리학은 표상의 형식들에 집착하지 않고 믿음과 욕망의 정도들 및 이것들의 조합들에 도달할 때 양적다. cf. La logique sociale, Paris : Alcan, 1893.) 따라서 무한소 수준의 모방, 대립, 발명은 흐름의 양자(量子)들과도 같으며, 흐름의 양자들은 믿음들과 욕망들의 전파, 이항화 혹은 결합을 표시해준다. 이런 이유로 표상들의 “늘지도 줄지도 않는” 지대뿐 아니라 돌출부들에도 관심을 둔다는 조건에서 통계학이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결국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또는 사이-개인적인 것)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집단적이건 개인이건 간에 표상들의 그램분자적 영역과 사회와 개인의 구별이 모든 의미를 상실하는 믿음들과 욕망들의 분자적 영역 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흐름들은 개인들에게 귀속될 수도 없고 집단 기표들에 의해 초코드화될 수도 없으니 말이다. 표상들은 이미 거대 집합이나 하나의 선 위에 규정된 절편들을 정의하는 반면, 믿음들과 욕망들은 양자(量子)에 의해 표시된 흐름들이며, 이 흐름들은 창조되거나 소진되거나 허물벗으며, 더해지거나 빼지거나 조합된다. 타르드는 미시사회학의 발명자로, 미시사회학에 외연과 범위를 부여했고 후일 이 미시사회학이 떠안은 오해를 미리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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