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 voyance는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용어다. 들뢰즈가 영화와 관련한 대담에서 한 말을 통해 이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자. 다른 철학자에게는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Ce qu’Hitchcock introduit ainsi dans le cinéma, c’est donc l’image mentale. Ce n’est pas affaire de regard, et, si la caméra est un oeil, c’est l’œil de l’esprit. D’où la situation extraordinaire d’Hitchcock dans le cinéma: il dépasse l’image-action vers quelque chose de plus profond, les relations mentales, une espèce de voyance.”(PP 79)
이 대목을 한국어 번역자 신지영 교수는 이렇게 옮겼다.
“히치콕이 영화에 도입한 것은 그러므로 정신적인 이미지입니다. 그것은 시선의 문제가 아닙니다. 카메라가 눈이라면, 그것은 정신의 눈입니다. 그로부터 히치콕이 처한 예외적인 상황이 설명됩니다. 그는 행동-이미지를 넘어 더 심오한 어떤 것, 정신적인 관계들, 일종의 투시(voyance)로 향했습니다.”(109쪽, 강조는 나)
영어본은 이렇다.
What Hitchcock thus brings into cinema, is, then, the mental image. It’s not a matter of the look, and if the camera’s an eye, it’s the mind’s eye. So Hitchcock has a special place in cinema: he goes beyond the action-image to something deeper, mental relations, a kind of vision.”(PP 54-55, 강조는 나)
일단 확인할 건, 한국어는 ‘투시’로, 영어는 ‘vision’으로 옮겼다. 무슨 뜻인지 여전히 어렵다.
그런데 같은 인터뷰의 앞에 같은 용어가 한 번 더 나온다. “En second lieu, l’image entretient de nouveaux rapports avec ses propre éléments optiques et sonores: on dirait que la voyance en fait quelque chose de ‘lisible’ encore plus que visible.”(PP 75) 한글본: “두 번재로 이미지는 그 고유한 시청각 요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투시력(voyance)은 그 이미지를 가시적이라기보다는 ‘가독적인(lisible)’ 어떤 것으로 만든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104쪽, 강조는 나) 영어본: “Second, the image bears a new relation to its optical and aural elements: you might say that in its visionary aspect it becomes more ‘legible’ than visible.”(PP 52, 강조는 나) 여기서 한국어는 ‘투시력’으로, 영어는 ‘visionary aspect’로 옮겼다. 이렇게 다르게 옮겼다면, 역자들이 용어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닌지 의심하고 가야 한다(일종의 독서 팁!). 사실 영어가 느닷없이 ‘in its visionary aspect’라고 한 것부터 의심스럽다.
그리고 단서를 하나만 더 찾자면, 들뢰즈는 이런 부류의 영화를 “un cinéma de Voyant”(PP 74)라고 칭했는데, 이를 한국어는 “견자(見者)의 영화”(102쪽), 영어는 “a Visionary cinema”(51쪽)로 옮겼다.
그렇다면 여기서 ‘본다(voir)’는 말에서 유래한 voyance나 Voyant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일단 voyance는 《동아출판 프라임 불한사전》에는 “[심령술] 투시력, 천리안”라고 나와 있다. 이것만으로는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데, 보통은 사전에서 적당한 말을 찾아 옮기기 십상이다. 정말 주의해야 한다. 특히 철학 용어 번역에서는! 이럴 때는 원어 사전을 보면 좋다. 《라루스(La Rousse) 사전》에 따르면 voyance는 clairvoyance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clairvoyance는 무슨 뜻? 두 가지 설명이 있다. 1. Faculté de voir avec clarté, sagacité, pénétration, lucidité. 2. Forme de perception extrasensorielle d’objets ou d’événements. 번역하면 이렇다. “1. 선명하고, 지혜롭고, 꿰뚫고, 명료하게 보는 능력. 2. 대상이나 사건을 초감각적으로 지각하는 형식.” 《동아출판 프라임 불한사전》에도 이 뜻으로 나와 있다. 1. 통찰력, 혜안, 선견지명. 2. [심령] 초감각적 투시력. 그렇다면, 한국어로 적절한 번역어는 무엇일까? 내 언어 감각에 따르면 ‘예지(력)’이 딱 어울린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예지(叡智)를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지혜롭고 밝은 마음’으로, 고려대한국어사전은 ‘사물의 도리를 꿰뚫어 보는 뛰어난 지혜’로 해설했다. 사전 찾기는 여기까지.
그러면 좀 이해가 될까? 인용한 구절들과 함께 보면 지금 말하는 내용은 대략 이런 뜻이다. 히치콕의 영화는 ‘몸의 눈’으로 보는 행위, 즉 ‘시선의 문제’와 상관없다. 그건 ‘정신의 눈’이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제 카메라는 정신의 눈, 몸의 눈이 아닌 ‘제3의 눈’으로서, 몸의 눈이 보지 못하는 ‘정신 이미지’ 혹은 ‘정신적 관계들’을 보며, 이런 점에서 ‘일종의 예지’이다. 따라서 이걸 몸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의 ‘가시적’이라고 하기보다 그걸 넘어서 있는 무언가를 보는 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보는 사람이 ‘예지자(Voyant)’, 즉 몸의 눈을 넘어서 꿰뚫어보는 자다. 이걸 들뢰즈는 ‘읽는다’는 행위와 연관지으며 ‘가독적’이라고 말한다. 글을 읽을 때, 혹은 기호나 문양을 읽을 때 동원되는 ‘정신 활동’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해서 처음 문장들을 옮기면 이렇게 될 것이다.
“히치콕이 영화에 도입한 것은, 따라서 정신 이미지다. 그건 시선의 문제가 아니다. 카메라가 눈이라면, 그건 정신의 눈이다. 이로부터 영화에서 히치콕이 처한 유별난 상황이 유래한다. 그는 행동-이미지를 넘어서 뭔가 훨씬 깊은 것으로, 정신적 관계들로, 일종의 예지로 향한다.”(PP 79)
이제 좀 이해가 갈까? 철학 책은 방금 해설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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