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를 통해 본 예술의 기능 – 죽음에게 외치며 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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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 《천 개의 고원》을 출판한 후 들뢰즈의 전략은 ‘미학의 정치화(政治化)’로 요약된다. 들뢰즈가 예술 연구에 매진한 것은 무슨 까닭에서일까? 분열분석과 혁명적 실천에서 예술의 고유한 역할은 무엇일까? 또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론을 그 시발점으로 삼은 것은 왜일까? “감각”이란 무엇이며, 감각은 과연 혁명적 역할을 담당하는 걸까? 그렇다면 어떻게?

《안티 오이디푸스》 말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예술과 과학은 혁명적 잠재력이 있으며, 단지 그것만이 있다.”(AO 454) 심지어 예술은 정신분석의 무의식 개념을 능가한다. “정신의학자들과 정신분석가들보다 로런스, 밀러, 케루악, 버로스, 아르토, 또는 베케트가 분열증에 대해 더 잘 안다 해도, 그게 우리 잘못일까?”(PP 37) 그렇다면 예술은 어떤 혁명적 잠재력이 있으며, 들뢰즈가 감각에 주목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한편 감각이란 무엇일까? 왜 베이컨이 출발점일까?

문제의 핵심은 ‘로고스(logos)(즉 이성과 논리)에 맞선 아이스테시스(aisthesis)(즉 감각)’다. 언어(logos)가 놓치는, 언어의 그물을 빠져나가는, 그리하여 언어를 통해서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또는 언어에 의해 추방되기만 해온 바로 그것을 감각(aisthesis)은 포착하고 파악하고 표현한다. 감각된 것(αισθητα)은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예술작품은 제아무리 많은 설명(logos)을 들어도 직접 감각하지 않으면 체험하지 못한다. 음악이나 회화를 말로 번역해 전달한들 그 말을 듣고 작품을 느낄 수 없다. 예술작품은 일차적으로 신경계에 직접 전달된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탁월하게 무의식적인 실천이다.

2.

베이컨은 ‘추상회화’와 ‘추상표현주의’라는 두 흐름을 피해 새로운 장을 열었다. 회화가 무의식적 활동이 되는 일차적 방법은 “재현(representation)”, 즉 “구상작용(figuration)”, “삽화(illustration)”, “서사(narration)”를 피하는 것, “감각 자극적인 것(sensational)”이나 “진부함(cliché)”을 피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회화에 필연적으로 이야기를 도입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들어오면, 지루함이 덮친다.”(Slyvester 65) 가령 잔혹하거나 선정적인 이미지는 잔혹하거나 선정적인 장면과 이야기로 즉각 우리를 데려간다. 우리는 이미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미지를 통과해서 이미지가 대리하는(represent) 어떤 다른 곳에 이른다. 이미지는 재현된 그 무언가에 종속된 채로 머문다. 따라서 재현은 감각이 아니며 심지어 감각과 반대된다. “(감각 자극적인 것, 진부함 같은) 재현된 것의 폭력에 감각의 폭력이 대립된다.”(FBLS 29) 베이컨은 말한다. “나는 심지어 내가 하는 것을 그다지 해석하지 않는다. (…) 결국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Slyvester 198)

요컨대, 베이컨은 지능이나 이성적 의식을 경유하지 않고 즉각 신경계에 작용하는 이미지를 요구한다. 이를 위해 신경계에 직접 작용하는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 말하자면 의식과 이성의 해석을 경유하기에 앞서 먼저 효과부터 산출해야 한다. 예술사적으로 보면, 이 시도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제 예술은 이성과 결별해서 독자적인 기능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논리적 설명이나 해석을 경유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술은 그 자체로 직접 효과를 산출할 수 있게 되었다.

비논리적으로, 비이성적으로, 본능적으로, 무의식에 기대 작업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도대체 그런 식의 제작(poiesis)이 가능하기나 할까? 뇌를 거치는 현대회화의 흐름은 “추상회화”로 갔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하지만 뇌를 피하는 일에 머문다면? 그것은 아마도 카오스와 파국에 이르리라. 베이컨이 추상회화를 비판하면서도 그 반대편에 있는 “추상표현주의” 또는 “비정형(informel) 미술” 역시도 비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후자는 이미지를 건립하지 못한다. 그려진 이미지는 잘 선별되고 정돈된 것이어야 한다.
베이컨이 작업에서 “우발(accident)”과 “우연(chance)” 의존하고 “본능”과 “영감”과 “무의식”에 기대면서도, “비판 감각(critical sense)”과 “비평(criticism)”에 기대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주어진 형태나 우발적 형태가 당신이 원하는 것 속으로 얼마나 결정화(結晶化)하는지에 대해서는 비판 감각, 즉 당신 자신의 본능들에 대한 비평만이 붙잡을 수 있다.”(Slyvester 102)

3.

이렇게 만들어낸 잘 정돈된 이미지, 즉 감각은 어떤 기능을 하며 어떤 효과를 생산할까? 베이컨은 우리가 베일 혹은 장막이 쳐진 채 삶을 살아간다고 본다. 예술은 느낌과 감각의 밸브를 열어줌으로써 구경꾼(onlooker)에 불과했던 이를 삶으로 더 격렬하게 돌려보내는 힘이 있다. 어떻게 감각은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는 걸까? 신경계에 직접 전달되는 “사실관계”란 무엇일까? 들뢰즈는 말한다. “괴로워하는 인간은 짐승이며 괴로워하는 짐승은 인간이다. 그것이 생성의 현실이다. 예술, 정치, 종교 또는 그 어떤 분야에서건 혁명적 인간이라면 어떤 누구라도 그가 짐승에 지나지 않는 이 극단적 순간을, 죽어 가는 송아지들에 대해서(de)가 아니라 죽어 가는 송아지들 앞에서(devant) 책임감을 갖게 되는 이 극단적 순간을 느끼지 않았으랴?”(FBLS 21) 베이컨도 말한다. “물론 우리는 고기(meat)이며, 잠재적 시체(potential carcasses)이다. 푸줏간에 갈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동물 대신 내가 거기 있지 않다는 점이 놀랍다.”(Sylvester 46) “가장 위대한 예술은 항상 인간 상황의 취약함(vulnerability)으로 사람을 돌려보낸다.”(Sylvester 199)

들뢰즈는 그 어떤 혁명적 인간이라도 자신이 “고기”에 불과하다는 극단적 순간을 느꼈으리라 단언한다. “괴로워하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 고기는 인간과 짐승의 공통 지대며, 그들의 분간불가능 지대다.”(FBLS 21) 그것이 바로 인간과 동물 간의 “분간불가능 지대, 미결정 지대”, “인간과 동물의 공통 사실”이다(FBLS 20)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외치게 하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의 정체는 바로 “죽음”이다. 베이컨은 이 점을 늘 자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사람들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은 하나의 우발이고, 인간은 완전히 하찮은 존재이며, 이유 없이 게임(game without reason)을 해내야만 한다는 것을.”(Sylvester 28) 인간 역시도 고기라는 사실,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삶이란 우연에 불과하고 궁극에는 죽음으로 끝나기에 무의미하다는 사실에 베이컨은 경악하며 소리 없는 외침을 내지른다.

4.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하지만 고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 멀리까지 가야 한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고기가 향할 최종 지점을 추가한다. “고기-머리, 그것은 인간의 동물-생성이다. 그리고 이 생성 속에서 몸 전체는 빠져나가려는 경향이 있고, 形象은 물질적 구조와 재결합하려는 경향이 있다. (…) 너는 이제 앞으로 모래나 풀, 먼지나 물방울…에 불과하리라.”(FBLS 23, 25)

모든 인간은 죽는다. 고기가 이를 입증한다. 죽음은 최악의 광경과 최악의 고통보다 훨씬 더 극복하기 어렵다. 이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 점이 뇌로, 이성으로, 의식으로 우리를 염세적이게 한다. 하지만 베이컨은 광경의 폭력이 아닌 감각의 폭력을 선택한다. 감각의 폭력은 뇌를 넘어 신경계에 직접 작용한다. 거부할 수 없게 작용한다는 점에서 감각은 폭력적이다. 하지만 바로 이 감각의 폭력은 삶을 생기 있고, 열어놓고, 두텁게 만든다. 감각 덕분에 죽음은 가시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이 죽음은 뻔한 가시성이기를, “우리를 쇠약하게 만드는 저 너무도 가시적인 것”이기를 멈추었다. 새로운 죽음은 삶이 탐지해 내고 들춰내고 보이게 만든 “저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것은 “장래의 힘들”이요 “문을 두드리는 장래의 악마적 권력들”, 즉 “시간(Temps)”이다. 삶이 죽음의 관점에서 판단되는 한, 삶은 허무하고 무의미하다. 이것이 뇌의 염세주의를 낳았었다. 하지만 죽음이 삶의 관점에서 판단되기 시작하는 순간, 베이컨도 말하듯 “우리가 실존하는 동안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몇몇 태도들을 창조”할 수 있다. 이것이 신경의 낙천주의이다. 죽음은 삶을 가능케 하는 심오한 원천이다. 사실 삶은 이런 점에서 예술 활동과 동의어이다.

5.

예술은 탁월하게 무의식적인 활동이다. 예술은 뇌를 통한 이해를 피하고 신경계에 직접 폭력적으로 작용한다. 감각은 일상적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피할 수 없다. 의식적 수준에서라면 적당히 베일 뒤에 숨을 수 있겠지만, 베일을 찢고 들어오는 힘들은 직접 신경계를 강타하기 때문이다. 감각은 이런 식으로 무의식적으로 혁명적인 효과를 산출한다. 감각의 실천적 효과는 이중적이다. 윤리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자각하게 되며, 정치적으로는 타인의 삶을 자각케 한다. 그런데 둘 중에서 감각은 정치적 효과와 더 관련된다. 제도 정치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면, 정치란 타인의 삶을 강제적으로 변화시키는 활동이다. 그리고 이 변화를 야기하는 데 있어 말보다 감각이 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말이 뇌에 호소한다면, 감각은 신경계에 직접 가 닿기 때문이다. 돌연 자기 삶이 자각된다. 삶이라는 것 자체가 자각된다. 갑자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전면적 무지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식으로든 자기 삶을 만들어 가도록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연히 왔지만 필연적으로 행동해야만 하게 된 사태. 남의 삶을 대신 사는 것도 아니고, 또 대신 살 수도 없다면, 정치적 실천이란 이 정도까지가 극한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예술의 정치적 잠재력을, 예술 창조와 예술 작품이 그 자체로 정치적인 것임을 단언한다.

약어 (인용 쪽수는 원서)
AO: 《안티 오이디푸스》(1972)
PP: 《협상들》(1990)
FBLS: 《프랜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 (1981)
Slyvester: 《베이컨과의 대화》 David Silvester, Interviews with Francis Bacon: The Brutality (3rd ed.), 1986.

2021년 Unfold X 기획자학교 심화과정 선정 프로젝트 홍희진 독립 큐레이터가 기획한 ‘중간계 : 생-산 (Middle Earth : Pro-duzione)’ 전시 연계 토론 “초연결사회, 예술을 묻다.” 2022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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