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직선이 있으면, 그것의 수직 방향 양쪽은 분리된다. 하지만 여기에 안(내면, 내부)과 바깥(외면, 외부)의 구별은 없다. 안과 바깥을 말할 수 있으려면, 폐곡선이 있어야 한다. 폐곡선이란, 원처럼, 한 점에서 시작해 다시 그 점까지 돌아올 때 그리는 궤적이다.
이렇게 되면 안과 밖의 구별이 생기는데, 어느 쪽이 안이고 어느 쪽이 바깥인지는 정하기 나름이다. 왜냐하면 이 선에 의해 구획된 공간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위의 그림에서 선으로 둘러싸인 안쪽이 A가 속한 지점이라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왜 B가 속한 쪽이 안쪽이 되지 못하겠는가? 가령 이 곡선이 지구와 같은 구 위에 있다고 생각해 보라. 가령 바다가 안쪽이고 육지가 바깥쪽인가? 아니면 그 반대가 참일까? 안과 바깥이 상대적이라 함은 이를 뜻한다.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점이나 선이 아니라 입체다. 현실 존재는 공간을 점유하며 펼쳐 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앞의 이야기를 연장할 수 있다. 안과 바깥의 관계를 공간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다루는 학문을 ‘토폴로지(topology)’, 즉 ‘위상학’ 혹은 ‘위상수학’이라 한다(토포스(topos)란 그리스어로 ‘장소’를 뜻한다). 폐곡선을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 ‘원환면(torus)’이다. 도넛과 손잡이 달린 컵은 위상적으로 동형임을 잘 보여준다. 그럼 여기서 안팎의 구별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가령 표면에 거주하는 개미에게는 자신이 있는 쪽이 안쪽일 것이고, 발밑 저편이 바깥일 것이다. 그러나 표면 아래에 거주하는 지렁이에게는 안과 바깥이 뒤집힐 것이다. 안과 바깥은 여기서도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생물에서는 안과 밖이 ‘막(膜, membrane)’에 의해 구별된다. 막의 안팎도 상대적이라 말할 수 있을 듯하지만, 운동을 공유하는 쪽이 안이다. 막과 막이 연동되는 방식은, 막으로 구획된 바깥과 맺는 관계와 다르다. 가령 동물의 몸에서 위나 장 같은 곳은 바깥이다. 그곳에 잠시 머무르는 음식물은 소화를 거쳐 일부가 막 안쪽으로 흡수되고 나머지는 항문으로 배출된다. 입에서 항문까지 이어지는 긴 관은 몸의 바깥이다. 그러나 세포막을 통해 연동된 몸의 부분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간직하는 바깥은 준-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관에 있는 것들도 일시적으로 몸의 운동을 공유한다.
엄밀한 의미의 안은 위상학적이기보다 생물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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