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도 지각할 수 있을까?

사물도 지각할 수 있을까? 생물이 지각한다는 건 명백하다. 지각은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뽑아내는 활동이다. 야콥 폰 윅스퀼이 잘 보여줬듯, 생물은 ‘둘레세계(Umwelt)’ 속에서 살아간다. 둘레세계는 이른바 객관적인 세계인 ‘환경(Umgebung)’ 중에서 뽑아낸 그 생물에게만 특유한 세계를 가리킨다. 여기서 생물은 보통 ‘종’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개체 간 차이를 배제하지 않지만, 대체로 종(혹은 개체군) 수준의 공통성을 놓고 봤을 때 개체 간 차이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아도 좋다. (자세한 내용은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2017)의 130~142쪽 참조.)

물음을 다시 묻자면 이렇게 된다. 사물에게도 둘레세계가 있을까? 혹은, 둘레세계는 생물에게만 고유한가? 들뢰즈가 베르그손의 테제를 활용하면서 《시네마》 연작에서 구별하려는 한 가지 주제가 이 물음과 관련된다. 들뢰즈는 ‘물질-운동-이미지’ 계열과 ‘뇌-몸-이미지’ 계열을 구분하며, 전자가 사물에 후자가 생물에 대응한다.

앞서 지각은 ‘뽑아내는 활동’이라고 했다. 뽑아내는 활동과 대립하는 것은 무엇일까?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일일 것이다. 이건 ‘활동’이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자동 반응’이라고 불러야 한다. 일정한 온도와 압력과 매질이 있을 때의 화학 반응을 떠올려 보면 좋다. 가령 1기압 상온의 물 한 컵에 각설탕 한 덩어리를 넣는 상황. 설탕이 녹는 반응은 ‘활동’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반면 지각은 활동이며, 무엇보다 행동의 준비 단계로서의 활동이다. 이점도 윅스퀼이 잘 밝혔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윅스퀼의 대표적 사례인 진드기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면서 이를 진드기의 기운(affect)이라고 불렀다.

“나아가 연합 환경 또는 합병된 환경이라는 생각을 밀고 나가면 그 결과 동물계에까지 이른다, 윅스퀼이 묘사한 것과 같은, 에너지와 지각과 행동이라는 특성을 지닌 동물계에까지. ‘진드기’의 저 잊을 수 없는 연합된 세계, 그것은 낙하 중력의 에너지, 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지각 능력, 작은 구멍을 팔 수 있는 행동력에 의해 정의된다. 진드기는 나무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나무 밑을 지나가는 포유동물 위로 떨어지며, 냄새를 맡고서 피부의 움푹한 부분으로 파고 들어간다(세 개의 요소로 형성된 연합된 세계, 이게 전부다). 지각과 행동의 특성들 그 자체는 이중-집게, 이중 분절과 같다.”(원서 67쪽)

“동물 세계를 정의하면서 폰 윅스퀼은 동물이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개체화된 배치체 속에서 짐승이 감당할 수 있는 능동적 기운들과 수동적 기운들을 찾아내려 한다. 가령 진드기는 빛에 이끌려 나뭇가지 끝까지 오르고, 포유동물의 냄새를 감지하면 포유동물이 가지 밑을 지날 때 자신을 떨어뜨리고, 가능한 한 털이 적게 난 곳에서 피부 밑으로 파고든다. 세 개의 기운, 이게 전부다. 나머지 시간에 진드기는 잠잔다. 때로는 수년간이나, 광활한 숲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한 채. 진드기의 권력의 등급은 두 극한 사이에, 즉 죽기 전의 포식이라는 최상의 극한과 굶으면서 기다림이라는 최악의 극한 사이에 감싸여 있다. 진드기의 세 기운들은 이미 종과 속의 성격들을, 다리와 주둥이 같은 기관들과 기능들을 전제한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생리학의 관점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에티카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생리학과 반대로 에티카의 관점에서, 기관의 성격들은 경도 및 그 관계들에서, 위도 및 그 등급들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르는 꼭 그만큼 몸에 대해 전혀 모른다. 즉, 몸의 기운들은 어떤 것들인지, 그것들이 다른 기운들과, 다른 몸의 기운들과 어떻게 합성될 수 있고 또 없는지, 그리하여 때로는 다른 몸을 파괴하거나 다른 몸에 의해 파괴되는지, 또 때로는 다른 몸과 능동들 및 수동들을 교환하는지, 또 때로는 다른 몸과 더불어 더 강력한 몸을 합성하는지 등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원서 314쪽)

요컨대 특정한 지각은 특정한 행동과 짝을 이루며, 행동으로 이어지지(연장되지) 않는다면 지각도 없다. 왜냐하면 지각은 있되 행동이 불가능하다면 그런 지각은 에너지 면에서 낭비이기 때문이다. 모든 자극을 다 흡수해버리는 블랙홀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행동이 가능하지만 지각이 없다면 그 행동을 촉발하는 그 무엇도 없는 셈이기에 행동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생물의 지각과 행동 사이에 얼마간 ‘틈’이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사물의 경우 즉각 작용-반작용이 일어난다. 그것은 규칙 혹은 법칙을 따른다. 하지만 생물의 경우 저 틈에 시간의 머뭇거림이 있다. 이 머뭇거림은 생물의 특징이다. 사물은 머뭇거리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생물에 고유한 ‘몸’을 말할 수 있다. 서양에서 몸과 물체는 언어로 구별되지 않는다(soma, corpus, corps, body, Körper etc). 생물의 몸과 사물의 물체는 같다. 하지만 둘레세계 혹은 지각과 행동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의 머뭇거림을 에워싸고 몸이 있다고 해야 한다. 즉, ‘누가’ 지각하고 ‘누가’ 행동하는가? 누가 뽑아내고 누가 돌려주는가? 윅스퀼의 기능고리 그림에서, 왼쪽 ‘지각 기관’과 ‘작용 기관’까지의 그 지점이 생물의 몸이다. 이런 점에서 사물은 몸이 없다. 지각도 행동도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몸 안에 있는 ‘틈’ 혹은 ‘머뭇거림’에 주목해야 한다. 조금 전에 지각은 있되 행동이 불가능하다면 에너지 낭비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도 많다. 가령 겁에 질려 꼼짝할 수 없는 상황. 몸은 얼어붙어 있지만, 몸 안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다. 그건 밖에서 보면 정지 상태지만, 안에서 보면 고밀도의 운동 상태다. 지각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 사이에서 부글부글 끓는 상태. 그걸 오래된 말로 ‘정(情)’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그리하여 이 회로를 그리라고 하면, ‘지각-정-행동’이라고 요약해야 하리라.

Comments

Leave a Reply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