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국인을 위해 개념(concept)이라는 말의 원초적 의미를 살피려 한다. concept가 conception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도 알아볼 것이다.
출발점은 원(原)인도유럽어(Proto-Indo-European) 어근인 *kap-으로 이 말은 ‘붙잡는다'(to grasp; saisir)는 뜻이다. 이 어근에서 라틴어 동사 capere(붙잡다; to grasp, take; 프랑스어 prendre, tenir)가 나왔으며, 종종 약화되어 -cipere의 형태로 다른 말과 결합되곤 하며, 과거분사 어근인 cep-도 여러 단어 속에서 암약한다(이 *kap-에서 라틴어 captare도 나왔는데, 이는 영어 catch의 어원이며, *kap-에서 원게르만어(Proto-Germanic) 어근 *haben-도 나왔는데 이는 고대 영어(Old English)의 habban을 거쳐 현대 영어 have가 되었다). 한편 다른 원인도유럽어 어근 *ghend- 역시도 ‘붙잡는다'(to seize, take)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영어 동사 get과 명사 hand가 유래했다. 이 어근은 라틴어 동사에서 -hendere의 형태로 여러 단어에 들어갔는데, 대표적으로 prehendere라는 동사(프랑스어 prendre)는 prae-(그 뒤에 있는 것은, before)라는 말과 결합해서 만들어졌고, ‘자기 쪽으로 붙잡는다’는 뜻이 더 강해졌다. 한편 원인도유럽어 *ten-(뻗다; to streach)에서 라틴어 동사 tenere(붙들다, to hold)가 나왔는데, 이 말은 프랑스어 tenir로 이어져서 많은 파생어를 만들었다. (다른 게르만어 어근 *tak-은 아마도 본래 ‘접촉하다'(to touch)라는 뜻에서 와서 ‘잡는다’는 뜻을 갖게 되었고, 영어 동사 take 형태로 남아 있으며, 이는 같은 뜻을 지니던 서게르만 어근 *nem-(독일어 nehmen에 남아 있음)을 점차 대체했다.)
내가 특히 *kap-과 *ghend-라는 어근에 주목하는 건, 이것들이 일차로 ‘붙잡는다’는 뜻이면서도 언젠가부터 정신화되어 마음의 활동으로 전용되었다는 데 있다. 물론 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주목한 바 있다. 인류 진화의 어떤 단계에서 ‘삶의 활동’과 직결되는 원초적 언어가 만들어졌고, 초기 인류가 지구 각지로 퍼지면서 원초적 언어들을 바탕으로 점차 어휘가 늘고 뜻과 용법도 분화되어 가다가 지역마다 고립되어 갔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납득되는 일이다(이와 관련해서 ‘바벨탑 프로젝트’를 참고할 수 있다). 그런데 문명이 어느 정도 발전한 뒤에는 말의 본래적 의미, 즉 활동적 의미는 점차 희미해지고 정신적 의미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런 일이 모든 언어권에서 일어났다는 점보다도, 한국처럼 번역을 통해 새 문명을 접하게 된 나라들이 이런 의미의 역사성을 놓치고 ‘최종적 의미’가 전부라고 여기면서 거기에만 매달린다는 점이다. 특히 철학이나 사상 분야에서 개념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번역할 때 이 문제는 두드러진다. (서양 학문을 처음 대할 때, 최소한 기본 개념들을 이해하는 단계에서는, 모든 개념들이 최근의 (많이 자의적인) 번역어일 뿐이고, 그 원래 언어의 맥락과 의미로 돌아가 충분히 숙고해야 한다는 점은 다른 자리에서 논한 바 있다.) 정확한 뜻을 놓치면서 그저 자꾸 사용해서 익숙해지고 그 후엔 이해했다고 생각하면서 개념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일이 허다한 것은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무튼 사설은 이 정도로 그치고. *kap-과 *ghend-라는 어근이 얼마나 많은 단어에 숨어 있는지 확인하려면 서점에서 Vocabulary 책을 사서 보기만 해도 된다. 쉬운 말부터, 주로 영어 어휘에서 시작해 보자. 가령 ‘내 쪽으로 붙잡는다'(승인하다, 동의하다)는 뜻의 영어 동사 accept는 ‘죽 이어져 도달하는 지점은'(to)을 뜻하는 라틴어 전치사 ad와 caperer가 합쳐진 말이며, ‘잡아서 밖으로 놓는다'(제외하다)는 뜻의 영어 동사 except는 ‘밖으로'(out)를 뜻하는 라틴어 전치사 ex와 caperer가 합쳐진 말이다. ‘되돌려 잡는다'(잡다, 받다, 받아들이다)는 뜻의 영어 동사 receive는 ‘되돌려'(back)를 뜻하는 라틴어 re와 capare의 약화된 형태 cipere가 합쳐진 말이며, ‘사이에서 잡는다'(가로막다, 가로채다, (둘로) 자르다, 방해하다)를 뜻하는 intercept는 ‘중간에, 사이에'(between)를 뜻하는 라틴어 전치사 inter와 cipere가 합쳐진 말이다. 영화 제목으로도 유명한 인셉션(inception)은 ‘안’ 또는 ‘안쪽으로’를 뜻하는 라틴어 전치사 in(원인도유럽어 어근은 *en)과 cipere가 합쳐진 말로, ‘손 안에 붙잡다(착수하다)’라는 뜻에서 ‘시작한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아는 내용일 터.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예열한 건 앞서 예고했듯이 conceive(프랑스어 concevoir), concept, conception이라는 말들의 본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돕기 위해서이다. 일단 동사형 conceive를 보면 com과 cipere가 결합된 라틴어 concipere에서 유래했다(여기서 잠깐 com-이라는 말을 보면, 이는 고전 라틴어 cum(함께하는 것은, 결합한 것은)의 옛 형태인데, 원인도유럽어 *kom-(곁에, 근처에, 함께하는 것은)에서 유래했으며, 라틴어에서는 종종 강세 접두사로도 쓰이며, 뒤에 오는 말에 따라 co-, cog-, con-, col-, cor- 등으로 변형된다). 그래서 conceive는 말뜻 그대로만 보면 ‘붙잡아서 자신에게 지니게 된다’는 뜻이고, 그래서 ‘(씨앗을) 자궁에 붙잡는다’는 뜻에서 ‘착상하다’ 또는 ‘임신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굉장히 생물학적인 뜻임에 유념해야 한다. 물론 이런 원초적 의미는 훗날 비유적으로 전용되며 ‘생각해내다’, ‘이해해서 알게 되다’ 등을 가리키게 되지만, ‘착상’, ‘수태’, ‘임신’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바로 이 동사의 명사형이 conception이다. 기독교 시대를 거치면서 생물학적 의미는 정신적 의미로 바뀐다. 그래서 이런 착상 능력이 정신 작용 속에서 만들어낸 ‘생각, 관념’ 등 지성의 생산물도 conception이라고 하게 되었다. 참고로, conception을 concept라는 한 단계 뒤에 만들어진 말에서 출발해서 ‘동사형 명사’로 오해한 후 “개념화”라고 번역하는 건 난센스도 이런 난센스가 없다. 한편 concept는 라틴어 concipere의 과거분사 conceptus(착상된 것, 초안; (a thing) conceived)에서 유래했는데, conceptus는 이미 ‘추상’ 또는 ‘추상된 관념’이라는 (conception과는 완전히 다른) 뜻을 갖고 있으며, ‘실제 사물에서 떼어내서 사물에 대해 정신이 만들어낸 관념’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말이 한자 문화권에 소개되면서 ‘槪念(개념)’으로 번역되었다. 번역어 ‘개념’은 출발점에 있지 않고, 이런 긴 언어 의미 변천사의 도착점에 있다. 한편 이 말은 독일어로 ‘번역’될 때 ‘붙잡는다’는 뜻의 동사 begreifen에서 온 Begriff로 옮겨졌으며(토속어), 라틴어 철자를 옮긴 Konzept는 ‘초안, 구상’이라는 본래 뜻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고, Konzeption은 ‘수태, 임신’이라는 뜻과 더불어 ‘착상, 초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나는 ‘개념’이라는 말의 역사를 추적했다. 아울러 이를 통해 conceive는 (생물학적, 정신적으로 두루 쓰일 수 있는) ‘착상하다’로, conception은 ‘착상’으로, concept는 ‘개념’으로 옮기는 것이 좋다고 제안한다. 또한 ‘개념’이라는 개념은 정신의 추상 작용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형상(~ 자체, idea)’이라는 개념을 발명했을 때 함께 발명된 개념이라고 보아야 한다. 개념, 추상, 관념의 친연성.
내가 나중에 다루고 싶은 개념은 ‘perceive, perception, percept’이다. 이 개념들의 어원인 라틴어 percipere는 라틴어 전치사 per와 cipere가 합쳐진 말로, per는 원인도유럽어 *per-(앞쪽으로, forward)에서 유래했는데, ‘가로질러, 철저하게, ~중에, ~로 인해’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기타 설명은 추후 다른 글에서.)
하나 더. 내가 첫 문단에 소개한 여러 어근들은 차차 주요 철학 개념을 이해하는 데 쓰임새가 있으니 일단 기억해 두자. 특히 인식 활동과 관련해서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다.
추가 더. 1) *cap은 capbale의 어원이기도 함. 2) conceptus가 정신적 의미로 정착된 건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임.
(2018.3. 최종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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