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머니즘 유감

내가 ‘신유물론’과 더불어 수상쩍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조류가 ‘포스트휴머니즘’이다. 신유물론을 언급할 때 내가 갑갑하게 생각하는 점 중 하나는 그들을 하나로 꿸 수 있는 공통의 줄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집합을 구성할 만한 원소들의 요건이 무엇인지는 그 용어를 만든 이들이 먼저 입증해야 한다. 나는 용어의 느슨한 사용에 늘 비판적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오늘날 건축과 예술의 일부 영역을 제외하고, 이 용어가 여전히 유의미하게 쓰이는가? 아마 ‘비판'(부정적 의미에서)이나 ‘비아냥’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용어를 중심으로 논의된 많은 현상은 대부분 헛짓이었다는 증거다. 더 정교하고 정확했어야 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을 보자. 이 용어는 둘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포스트-휴머니즘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휴먼-이즘이다. 전자라면 ‘휴머니즘’에 대한 대응과 대안을 모색하는 조류고 후자라면 ‘휴먼’ 즉 ‘인간’에 대한 대응과 대안을 모색하는 ‘이즘’이다. 휴머니즘의 핵심에 있는 게 자율적인 주체다. 인간 주체가 다분히 자율적으로 행동하며 세상을 주도한다는 견해. 하지만 이런 의미의 휴머니즘이라면, 이미 반 세기도 더 전에 충분히 비판받은 바 있다. 아니, 스피노자나 맑스, 니체 사상의 핵심도 휴머니즘을 비판했다. 따라서 전자의 포스트휴머니즘은 이미 역사의 일부다.

후자라면? 여기서 관건은 ‘휴먼’이 무엇이냐다. 생물학적 차원에서 휴먼은 30만 년 전과 지금 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규정으로서의 ‘휴먼’이 관건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휴먼은 전자의 휴머니즘에서 본질(?)에 해당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이 확인된다. 결국 포스트휴먼-이즘은 대체로 포스트-휴머니즘으로 소급된다.

따라서 포스트휴머니즘은 실체가 없는 용어다. 아니면, 유령처럼 떠도는 저 오랜 비인간주의의 흔적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늘 같은 주장을 해왔다. 역사 속 문헌을 읽어라. 역사를 생략하고 현대 문헌을 읽으면, 과거 누군가가 다 했던 말을, 그것도 더 힘없이, 되풀이하게 된다는 점에서 하나마나 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새로움'(New) 혹은 ‘후'(다음, Post)의 본질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정해야 하는데, 내 생각에 이런 시도는 대체로 실패했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대부분의 ‘새로움’과 ‘다음’도 마찬가지로 실패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어떤 걸 다루기 전에 반드시 다른 어떤 걸 다루자는 고답적인 주장을 반복하는 게 아니다. 무엇이 현재의 문제에 더 유의미한 관점을 주느냐를 놓고 겨뤄보자는 거다. 다 읽기 어려우면, 전제만이라도, 들뢰즈가 ‘생각에 대한 상'(image de la pensee)이라고 명명한 그것만이라도 놓고 비교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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