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과타리는 기계(machine)와 도구(instrument)를 구별한다. 이 구별이 왜 중요하냐면, 기계를 도구로 보는 이상 기계에 대한 ‘도구주의’ 관점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계 혹은 기술(technology)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도구라고 여기는 데 익숙하다. ‘양날의 검’ 같은 표현에 이런 통념이 깃들어 있다. 잘 쓰면 이롭지만 잘못 쓰면 해롭다는 것.
들뢰즈와 과타리는 기계와 도구를 구별하지만, 또한 기계와 기술도 구별한다. 기술 기계는 기계의 일부일 뿐이며, 다른 기계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기계 중 하나가 ‘사회 기계’다. 사회 기계는 기술 기계와 인간을 부품으로 삼아 작동한다. 그러니까 인간 자신이 더 큰 집합체의 부분으로 함께 참여한다는 점에서 기술 기계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일례로 고대 그리스의 밀집 장창 보병대, 즉 팔랑크스(phalanx)를 보자.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병사들은 투구, 흉갑, 정강이받이를 착용하고 왼팔에 고정 가죽끈으로 묶은 대형의 원형 방패(‘아스피스’ 혹은 ‘호플론’)로 자신의 몸 일부와 왼쪽 병사의 몸 일부를 가리고 오른손에 장창을 들고 바짝 다가서붙은 밀집진을 형성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투구, 흉갑, 정강이받이, 아스피스, 장창만이 아니라 이것들이 연결되어 형성한 집합체에 주목한다. 이 집합체, 혹은 배치체(agencement, assemblage)는 각 요소들 혹은 부품들에 없던 그 무엇의 출현이다. 팔랑크스는 고대 그리스 도시 위에 건립된 하나의 기계다.
디지털 기술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내가 3대 인프라(인터넷, 이동통신, 개인 디지털 장비)와 6대 기술(클라우드, 사물인터넷, 로봇공학, 인공지능, 블록체인, 확장현실)에 주목했던 것은, 디지털 기술을 사회 기계의 맥락에서 분석하려 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생성 인공지능 때문에 세간에서는 인공지능에 초점이 모아지지만, 기술을 분석하려면 항상 더 넓은 범위와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광물, 에너지, 물, 물류도 고려해야 할 테고, 제도, 관행, 법, 외교도 봐야 하고 가장 외곽에선 자본주의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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