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을 중재하는 것을 ‘미디어’라 한다(medium이 ‘중간’이라는 뜻). 미디어는 기억 혹은 저장 기능을 통해 만남의 시간과 공간을 확장한다. 즉, 오래 지속하고 멀리 전파되게 해준다. 미디어의 역사에서 인터넷의 보급과 이동통신의 일상화는 중요한 획을 긋는다. 매클루언이 주로 분석한 미디어는 TV로 대표되는 대중매체(매스미디어)였다. 1980년에 사망했으므로 매클루언은 진정한 인터넷을 목격하지 못했다.
대중매체의 시효는 활판 인쇄였다. 말하자면, 구텐베르크에서 TV까지는 하나의 미디어 시기, 즉 대중매체의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그전에 문자와 필사의 시기, 더 전에 암송과 구술의 시기가 있었고. 나는 대중매체 다음 시기의 미디어를 ‘소셜미디어’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출간된 글로는 공저 «포스트휴먼과 융합»의 한 꼭지인 ‹개체 중심에서 초연결 관계 중심의 사회로›가 있음).
타르드가 제시하는 만남의 방식은 여럿인데, 가장 첨단에 대중매체가 있다. 우리가 타르드의 분석을 21세기화하려면 소셜미디어 환경을 분석해야 마땅하다. 특히 대중매에와 소셜미디어의 차이를 잘 이해해야 오늘날 ‘사회 논리’, 즉 사회적인 것의 작동 논리를 탐구할 수 있다. 말하자면, 타르드가 쓴 «모방의 법칙»(1890), «사회논리학»(1895), «사회법칙»(1898), «여론과 군중»(1901) 등을 소셜미디어 환경을 고려하며 재서술해야 한다는 뜻이다.
타르드는 각자의 작은 뇌에서 출발하는 발명과 모방에 주목했다. 동시에 전파를 가로막는 장애가 없다면 동시 ‘동기화’가 가능하리라 전망했다. “절대적이며 완전한 사회성은, 하나의 뇌 안 어디에선가 나타난 어떤 좋은 생각이 도시의 모든 뇌에 순식간에 전해질 만큼 매우 강렬한 도시 생활에 있을 것이다.”(«모방의 법칙», 한글본, 113쪽)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회성은 타르드에겐 상상의 영역이었을 뿐 실제로는 이상에 가까웠기 때문에 추가의 사색을 이어가진 않았다. 그런데 소셜미디어 환경은 그런 여건을 현실화했다.
타르드의 전망과 달리 각각의 뇌가 발신하는 ‘좋은 생각’은 그 개수와 관계의 복잡성 때문에 오히려 확산이 더뎌지고 군데군데 응집해서 더 이상 전파되지 않는 상황에 빠진 것 같다. 말하자면 대중매체 환경은 적절한 유통 속도를 찾아간 데 반해 소셜미디어 환경은 속도라는 것 자체가 파괴되는 국면으로 치달은 게 아닌가 싶다. 위조뉴스, 확증편향, 동굴효과, 인포데믹 등을 타르드라면 어떻게 분석할까?
202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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