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에 대한 어떤 책을 읽다가 느낀 바가 있어 몇 자 적어보려 한다. 전에 읽었던 책에서도 보인 문제인데, 관련 서적의 역자들이 철학 공부를 한 적이 없어서인지 representation이라는 용어를 ‘표현’이나 뭐 그 비슷한 말로 옮기고 있다(동사 represent도 마찬가지). 사실 이렇게 옮기고 서로 이해한 걸로 간주하고 나면, 진도는 나갈 수 없게 된다. 이건 원서를 보는 엔지니어에게도 통용되는 문제.
representation을 요점만 말한다면 인식 주체에게 생겨난 ‘상( image, idea)’이라고 보면 된다. 가령 뇌는 사물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상과 접촉한다. 그 상은 아마도 뉴런들의 연결과 관련되어 있으리라. 아무튼 통상 우리가 정신적인 것(마음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representation이며, 철학에서는 ‘표상’이라고 옮긴다(그 유래는 아래 첨부 사진 참조. 내가 쓴 책 «생각의 싸움» 중 칸트 부분에서 가져왔는데, 이어지는 문단에 설명이 계속된다).
인공지능에서 표상이 왜 문제거리냐면, 인간에게 표상이 있다는 건 분명하게 자각되는데(이걸 환상이라 보는 이들도 있지만, 환상으로서일지라도 자각된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으며, 나아가 많은 인간이 그런 자각을 지닌다는 보고도 분명하다), 컴퓨터 프로그램인 인공지능이 그런 걸 지닐 수 있느냐 하는 게 과제이다. 이 문제는 결국 강인공지능(AGI)의 가능성과도 관련된다. 표상을 지니는 인공지능은 최소한 인간 마음의 작용을 구현한 셈이므로(인간 마음의 다른 특성들은 대체로 이 능력으로 환원될 수 있으며, ‘감각질qualia’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철학적으로 하나 더 보태자면. 인간은 세계에 대한 표상을 지닐 수 있다(이걸 인공지능 논의에서는 ‘지식 표상’이라 부른다). 이걸 바꿔 표현하면, 인간에겐 우선 표상이 있어서, 그걸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 인공지능이 표상을 갖는다면, 그걸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데미스 허사비스처럼 표상 밖에는 세계가 없다고 가정하면 물론 결론이 달라지겠지만, 많은 경험론자들이 말하듯 표상은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표상을 구현한다 할지라도 그 바깥에는 항상 잉여인 세계가, 또는 표상이라는 잉여를 만들어내는 세계가 있음을 명심해야 하리라. 영국 사람 허사비스가 칸트주의자가 된 건 어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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