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은 생각이다

나는 «공동 뇌 프로젝트»에서 생각이 개인 내면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외화된 형태로 존재한다고 여러 군데서 주장했다.

‘나’의 내적 경험이 유의미하려면 ‘타인’에게 잘 전달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또한 타인이 나의 내적 경험에 동감할 수 있어야 한다. 동감은 이해에 바탕을 둔다. 아, 저 사람도 나와 같은 경험을 했구나, 나와 같은 느낌 이었구나, 같은 생각을 가졌구나! 이 지점을 ‘외화된 내적 경험’ 혹은 ‘객관화된 생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생각이 언어라는 미디어를 통해 물질적으로 드러나 누구라도 접근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이 꽤 많은 사람에게 동감되는 순간, 생각은 ‘객관성’과 ‘실증성’을 얻는다. 철학이든 문학이든, 고전이 오늘날까지 울림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46쪽)

 

인류는 문명이라는 기억을 딛고 성장했으며, 사실상 이 기억과 외연이 거의 겹친다. 기억은 인간의 생각에서 발원했지만 인간 사이에 존재한다. 역으로 기억은 인간의 생각을 형성하며, 그럼으로써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문명의 양육을 거치지 않은 인간은 동물 종으로는 인간(호모사피엔스)일지 몰라도 속이 채워진 인간은 아니다. 오늘날 인간은 문명이라는 보육 장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은 마음이 인간 ‘내면’에 있는 동시에 인간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의 마음과 생각은 오직 ‘다른 이’의 마음과 생각을 통해서만 확인되고 파악된다. 생각은 내면에 머물 때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외화 外化 될 때 비로소 실존 한다. 물질을 입어야 비로소 생각이 존재하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물질은 소리(음성), 문자, 인쇄, 전기 및 전자 장치, 물리적 재료속 형상화 등 누구라도 접근할 수 있는 객관적 미디어를 가리킨다.

우리는 누군가의 생각을 ‘미디어’를 통해 접한다. 또, 그 누군가 자신에게도 생각이 보존되고 지속되려면 ‘미디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내면의 기억이란 휘발되기 쉬운 법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야말로 생각이 존재하는 곳 아닐까?내면의 생각마저 인간 사이로 옮겨질 때야 비로소 진짜 존재하게 되는 것 아닐까?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섬은 고립의 장소가 아니라 공유의 장소가 아닐까? 이 섬이야말로 바로 공동 뇌고, 공동의 마음과 생각 아닐까? 내밀히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바깥으로 나온 마음과 생각 말이다. 이런 점에서 마음과 생각은 개인의 고유한 재산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그 무엇이며, 개인은 그 일부를 잠시 나누어 가진 것에 불과한 것 같다. 즉,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에 가깝다. 내 바깥에서 와서 머물며 재조립되고 변형되어 내 바깥으로 표현되어 이번에는 다시 모든 사람의 것이 된다. 내 생각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각자의 생각은 공동 뇌라는 호수로 흘러들었다가, 각자라는 지류로 환류하는 게 아닐 까? (90-92쪽)

 

시인들의 통찰을 통해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인간 ‘내면’에 있지만 또한 인간 ‘사이’에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표현되지 않은 생각은 잠재된 상태로만 있다. 생각은 표현되어야 비로소 실재하게 되는데, 표현은 누구나 공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물질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흔히 예상하는 것과 달리 생각은 늘 외화된 형태로 존재한다.

물질 미디어의 형태로 외화된 생각, 인간 사이에 있는 생각, 인류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객관화된 생각, 개인들로 흘러들고 개인들이 다시 채워 넣는 인류 공동의 소유물, 이것이 바로 인류라는 공동 뇌다. (92쪽)

 

공동 뇌는 외화된 생각, 물질화된 생각의 총체다. 근대적 개인은 이동의 단위인 몸과 그 몸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나의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이 물질 세계와 연동되어 있다는 아이디어는 스피노 자나 마르크스를 비롯해 유물론자들이 잘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이라는 내면은 무의식이 발견된 후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모든 생각은 잠재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외화되고 물질화되어야 실재할 수 있다. 나의 속마음은 일차로는 내적 기억으로 간직됨으로써, 그러나 물질 미디어에 기록됨으로써 오래 유지될수 있다. 하물며 나의 생각이 타인에게 전달되려면 반드시 물질 미디 어를 거쳐야 한다. 음성이든, 몸짓이든, 문자든, 형태든, 색이든, 그 어떤 외화된 기호 형태로든, 생각은 내면의 외부에 자리잡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생각은 내 ‘안’에 있는 것이면서도 개인들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과 같다. 그 섬이 바로 공동 뇌다. (199-200쪽)

이상 몇 구절을 꼽아봤다.

여기에 보태 물질도 생각이다.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스마트폰, 태블릿, PC도 그 자체로 생각이고, 이 글자 하나하나도 생각이다. 당신이 걸친 옷과 앉아 있는 의자 혹은 방바닥도 생각이고, 당신이 있는 집, 사무실, 차량, 들판도 생각이다. 이 모두가 내면에 갇힌 것이 아닌 물질화되고 외화된 생각이다. 이런 생각의 일부는 들뢰즈와 과타리(1972)가 주목한 맑스와 엥엘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1845-46)의 구절들에서도 강조된다.

그(=포이어바흐)는 자신을 둘러싼 감각 세계가 영원에서 직접 주어진, 다시 말해 언제나 같은 것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산업과 사회 상태를 통해 생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감각 세계는 역사의 산물이며, 일련의 세대가 활동해온 결과이다. 이 일련의 세대에서 각 세대는 선행하는 세대에 의존해 왔고, 그 위에서 자신의 산업과 교류를 형성해 왔으며, 변화된 욕구에 따라 자신의 사회적 질서를 변경해 왔다. 포이어바흐는 가장 단순한 “감각적 확신”의 대상조차 단지 사회적인 발전을 통해서, 산업과 상업적 교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벚나무도 거의 모든 과수나무와 마찬가지로 불과 수백 년 전에 교역을 통해 우리 지역으로 이식된 수종이다. (‘의식의 생산에 관해’, MEGA-II 5권, 19쪽; MEW 3권, 42쪽; 이병창 역, 94-5쪽)

 

이상의 모든 것이 당연히 자연적 인간, 다시 말해 generatio aequivoca을 통해  처음 출현한 인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인간을 자연과 구별된 존재로 고찰하는 이래로 이런 구별이 중요하게 된다. 덧붙이면 인간의 역사 전에 존재하는 자연은 포이어바흐가 살아가는 바로 그 자연이 아니다. 그런 자연이란 새롭게 생겨난 호주의 몇몇 산호섬을 제외하면 오늘날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자연이며 따라서 포이어바흐에 대해서도 존재하지 않는 자연이다. (MEGA-II 21쪽; MEW 43-44쪽, 이병창 역, 97쪽. generatio aequivoca에 대해서는 내가 쓴 영어 논문(2013) 참조.)

나는 여기에 보태, 노동, 역사, 산업, 교류 등도 ‘생각’의 물질화-외화된 형태라고 본다. 어,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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