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뢰즈의 《베르그손주의》를 번역한 건 석사 때였다. 당시 프랑스어를 겨우 읽어낼 수 있는 처지에(나는 고등학교에서 독일어 선택이었다), 영역본을 참조하며, 그야말로 프랑스어를 배워가며 더듬더듬 번역했다. 이 초역을 다듬어 문학과지성사에서 책을 출간한 건 군에서 제대한 직후였다(1996년 12월 5일, 당시 27세).
그리고 이제 24년이 지났고, 그린비에서 새 번역을 내기로 했다. 최근 강의와 원고 일정이 조금 빈 틈을 타서 새로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옛 원고의 미진함이 많이 눈에 띄어 부끄럽다. 나이에 비해 나는 한국 들뢰즈 연구의 1세대이다. 꽤나 긴 세월이 지났다. 잘못 소개한 대목들을 사과하고 싶다.
들뢰즈의 베르그손 연구는, 베르그손 전문가가 평가하기에 실제 베르그손의 사상과 다르다고들 하지만, 베르그손 자신이 아마 깊게 생각했더라면 도달했을 사상, 즉 들뢰즈 본인의 사상을 잘 담은 수작이다. 아마 베르그손은 니체와 프루스트 정도를 제외하면 박사논문을 쓰기 전 가장 강한 영향을 받은/준 선구자였으리라.
들뢰즈가 베르그손을 정리, 소개하는 방식은 ‘문제’에 대한 접근에서 도드라진다. 책 초반에 있는 관련 대목의 번역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다만, 이런 접근이 오늘날 학문과 교육에서, 나아가 비즈니스와 경영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만큼은 확실히 짚어두고 싶다.
“실제 우리는 맞고 틀리고가 답[解]하고만 관련되며 답에서 맞고 틀리고가 시작된다고 믿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이 편견은 사회적이다(사회와 사회의 명령어mots d’ordre를 전달하는 언어활동langage은, 마치 “도시의 행정 서류함”에서 나온 것인 양 틀에 박힌 문제들을 “내놓고는”, 우리에게 자유의 여지를 거의 허용하지 않으면서 문제들을 “풀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편견은 유년 교육과 관련된다. 문제를 “내는” 사람은 유치원 선생님이고, 학생의 임무는 답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일종의 예속 상태에 갇혀있었다. 참된 자유는 문제 자체를 결정하고 구성하는 능력에 있다. “거의 신적인” 이 능력은 참된 문제를 창조적으로 솟아나게surgir 하는 것만큼이나 가짜 문제를 소거하는 것을 내포한다. “진실로 철학에서, 또한 다른 것에서도, 문제를 푸는 것보다 문제를 발견하고 그 결과 문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변적인 문제는 잘 설정되자마자 풀려버리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어떤 문제의 답이 숨겨진 채로, 말하자면 덮인couverte 채로 있을지라도, 답은 그 즉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제 남은 건 답을 들추는découvrir[發見] 것뿐이다. 그러나 문제 설정하기는 단순히 발견하기가 아니라 발명하기다. 발견은 현행적으로든 잠재적으로든 이미 존재하는 것과 관계된다. 따라서 그것은 조만간 올 것이 분명하리라. 발명은 없었던 것에 존재를 부여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은 절대로 올 수 없었으리라. 형이상학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수학에서는 발명하려는 노력은 대개 문제를 생겨나게 하는 데, 문제를 설정할 수 있게 해주는 항들을 창조하는 데 있다. 문제의 설정과 문제의 답은 여기서 우열을 가르기 어려우리만큼 아주 가까이 있다. 참된 위대한 문제는 풀릴 때만 정립된다.” – 들뢰즈, <베르그손주의>, PUF, 1966, pp. 3~4.
2020.10.27 페이스북.
(덧. 2021년 7월 23일에 출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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