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새로운 교육이어야 하는가?

교육학자 이혜정은 《대한민국의 시험》(다산지식하우스, 2017)에서 미래 사회에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개의 자료를 제시한다.

먼저 ‘노동 시장에서 필요한 업무 속성의 변화’를 나타내는 첫 번째 자료다(58쪽).

이 그래프에 나타난 업무의 종류는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반복적 업무

— 규정에 따라 수행 가능, 영역이 명확히 정의되어 제한적

• 반복적 인지 업무 (예시: 회계, 데이터 입력)

• 반복적 육체노동 업무 (예시: 공장 조립라인의 생산, 모니터링 작업)

비반복적 업무

— 문제 해결력과 고도의 소통력을 지녀야 수행 가능

• 비반복적 분석 업무 (예시: 엔지니어링, 과학 기술 응용)

• 비반복적 대인관계 업무 (예시: 전문적인 관리, 감독, 협상, 제휴)

• 비반복적 육체노동 업무 (예시: 식사 준비, 호텔 방 청소)”(58-59쪽)

그래프는 시간이 지날수록 비반복적 업무, 그 중에서도 대인관계와 분석 업무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경향이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 자료는 ‘문제 해결 능력에 따른 직업군 고용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이다(60쪽).

이 그래프는 하위 수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직업군은 큰변동이 없는 반면, 중하위 수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직업군은 감소하고 있으며, 상위 수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직업군은 급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앞으로 상위 수준의 문제 해결 능력을 가진 사람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증가할 것임을 예상케 한다.

두 자료에 따르면, 미래에는 엔지니어링, 과학 기술 응용 같은 비반복적 분석 업무나 전문적인 관리, 감독, 협상 제휴 같은 비반복적 대인관계 업무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데, 이는 문제 해결력과 고도의 소통력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업무는 상위 수준의 문제 해결 능력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이혜정은 다음과 같이 분석하기도 한다.

“오늘날 가장 쓸모없는 기술이 되어 버린 반복적 인지 기술. 취업에 가장 불리한 능력이 되어 버린 중하위 수준의 문제 해결 능력, 지식과 정보에 대한 수용적 학습에 몰두하고 있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이를 통해 기르고 있는 것이 바로 반복적 인지기술 그리고 중하위 수준의 문제 해결 능력이다.”(61쪽)

이에 반해 OECD 교육국장을 역임한 바바라 이싱어(Barbara Ischinger)의 입을 빌어 지금 시대에 필요한 핵심 능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국제적 트렌드와 과제에 대한 지식과 관심, 개방성과 유연성, 자존감과 회복탄력성, 커뮤니케이션과 대인관계 관리.”(61쪽) 필요한 미래 역량을 세부적으로 분류하고 묘사하는 방식은 여럿일 수 있지만, 과연 대한민국의 아이들이 매달리는 수능 공부가 이런 능력을 키워주지 못한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이혜정은 대안으로 IB(인터내셔널 바칼로레아)를 제안한다. 그것은 ‘집어넣는 교육’ 혹은 ‘수용식 교육’이 아니라 ‘꺼내는 교육’,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교육’이다. 취지는 좋지만, 이혜정이 또 다른 메이지 유신이라고 소개한 2013년 일본의 IB 도입이 ‘표면적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점은 하나의 반면교사가 아닐까 한다. 2015년 일본 문부과학성은 2018년까지 IB를 200개 학교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2021년 12월 22일 현재 이수자가 0.019%(560명)에 불과하며, 난이도와 비용의 문제로 인해 상위권 학생들만 선택하게 되어 새로운 학력 격차를 키우게 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이혜정이 제시한 두 개의 자료는 앞으로의 교육이 향해야 할 방향을 예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나아가 이 자료는 이른바 ‘엘리트 교육’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내가 여러 저서와 정책 보고서에서 제시한 대안은 종종 ‘엘리트 교육’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즉,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한 보편 교육이 아니라 상위권 몇 퍼센트만을 위한 교육이라는 비판이다. 비판의 근거는 교육해야 할 내용이 너무 많고 어려워서 대다수가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추정에 있다.

나는 이런 비판이 교육의 이상과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다고 본다. 다른 모든 논의에 앞서 짚고 가야 할 점이 있다. 그건 ‘그런 건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다’는 견해이다. 배우지 않아도 좋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는 가장 위험한 주장이다.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건 너무 많다. 예술을 몰라도, 철학을 몰라도, 수학과 과학을 몰라도 사는 데는 지장 없을 것이다. 다만, 인간답게 살고 민주 시민으로 사는 데도 지장 없지는 않다. 코로나 백신을 반대하고, 예술은 사치니까 예술가는 가난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공정과 상식을 내세우며 자기 이익만 좇고, 세상 돌아가는 걸 진짜로 이해 못해 잘못된 공적 의사결정을 하는 등, 이런 게 다 예술과 철학과 과학을 몰라서이다.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다. 다만, 모르면서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자유인으로서 사는 건 불가능하다.

하나 더 짚어야 할 점이 있다. 그건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이라는 허상이다. 본래 공부는 어렵다. 호기심을 느껴 스스로 더 알고자 하는 주제가 아니라면,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더 나은 직장에 취직하고, 더 넓은 아파트에 살기 위해서만 공부하는 건 아니다. 공부의 의미는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 것도 모를 때는 아무 의미도 느끼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알고 난 후에는 그 동안 한 일의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사실 모든 훈련(paideia)은 그런 성격을 갖는다. 심지어 좋아하는 일조차도 훈련하는 건 피하려는 게 인간이다. 그런 역경을 딛고 극복하는 훈련은 눈앞의 성취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그 자체로도 끈기와 강인함을 길러주는 과정이다. 따라서 아이에게 행복한 교육은 지금의 아이와 나중의 성인을 모두 고려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공부를 덜 시키는 게 능사는 아니다. 이를 위해 교육과정을 어떻게 짜느냐 하는 건 별도의 사안이다.

끝으로 엘리트의 사회적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 엘리트란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이다. ‘전문성’이라는 점에서 엘리트는 소수일 수밖에 없다. 다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문적이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전문가에 대해 존경과 질시라는 이중 잣대를 갖고 있다. 존경은 그의 능력을 향해 있고 질시는 그의 보수(수입, 명성, 위신 등)를 향해 있다. 이 이중성은 전문가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정을 포함한다. 대다수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은 존경할 만한 일이다. 따라서 엘리트를 키우는 교육은 사회에 필수적이다.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면 전문가의 능력은 꼭 필요하다. 그렇다면 엘리트는 언제부터 교육해야 할까? 이것이 쟁점이다. 초중고 과정에서 엘리트 교육을 하게 되면 나머지 일반 학생이 따라가지 못해 피해를 본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엘리트 교육을 별도로 하는 것에 대해서도 다수가 반대한다. 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아 좋은 대학을 차지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엘리트 교육은 설 자리가 없다. 엘리트는 필요하지만 길러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다수 여론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지 않은데, 그동안 대한민국의 엘리트는 사회적 책무보다 자신과 자기 동아리의 이익을 우선시해왔다. 질시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Comments

Leave a Reply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