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혹은 “esse est percipi(존재는 지각된 것이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는데 소리를 들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나무는 소리를 낸 것일까? (If a tree falls in a forest and no one is around to hear it, does it make a sound?)

아일랜드의 철학자이자 성공회 주교인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전거는 없다. 비슷한 구절로는 《인간 지식의 원리에 대한 논고(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1710)의 몇 대목이 발견된다.

그러나, 예를 들어, 곁에 그것을 지각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공원의 나무나 벽장 속에 존재하는 책을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 감각의 대상은 지각될 때만 존재한다. 따라서 나무는 그것을 지각할 누군가가 곁에 있는 동안만 … 정원에 있다.

But, say you, surely there is nothing easier than for me to imagine trees, for instance, in a park, or books existing in a closet, and nobody by to perceive them. (…) The objects of sense exist only when they are perceived; the trees therefore are in the garden… no longer than while there is somebody by to perceive them. – 각각 23절, 45절.

이 구절을 요약하는 표현은 이렇다. esse est percipi (being is perceived; 존재는 지각된 것이다). percipi는 라틴어 동사 percipio(영어 perceive)의 과거분사다.

만일 지각하는 자가 없다면?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는 지각할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숲속에는 아무 것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까? 더 쉽게 말해 모두가 외출하고 나면 집은 없는 걸까? 주교로서 버클리는 그 어떤 지각자가 없더라도 신은 여전히 지각한다고 보았다. 그러니 인식론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다.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roy Bateson)은 《마음과 자연: 필연적 통일(Mind and Nature: A Necessary Unity)》(1979)에서 이 주제를 다시 논한다. 베이트슨은 이중구속 이론, 시스템 이론, 사이버네틱스 등을 발전시킨 초기 연구자이기도 하다.

차이들은 버클리 주교가 듣지 못한 쓰러지는 나무 소리와 함께 영원히 사라진다. (97쪽)

여기에 베이트슨은 주석을 붙인다.

지각된 것만 ‘실재(real)’하며 아무도 듣지 않은 쓰러지는 나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고 주교는 주장했다. 잠재적 차이들, 즉 어떤 이유에서건 차이를 만들지 않는 차이들은 정보(information)가 아니며, ‘부분’, ‘전체’, ‘나무’, ‘소리’는 인용 부호 안에서만 그렇게 존재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나무’를 ‘공기’ 및 ‘땅’과, ‘전체’를 ‘부분’과, 등등, 구별하는 것은 바로 우리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무’는 살아있으며 따라서 그 자신이 모종의 정보를 수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무도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분별할 수 있다. (97쪽)

베이트슨에 따르면 정보란 ‘차이의 소식(news of difference)’이며 ‘차이를 만드는 차이(any difference that makes a difference)’이다. 이런 차이관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1968)에서 개진한 그것과 일치한다(서로 독립해서 이런 이론을 세웠다). 물론 들뢰즈는 베이트슨한테서 많은 것을 차용하며(가령 이중구속 이론), 무엇보다 《천 개의 고원》(1980)의 ‘고원’ 개념을 가져온다. 베이트슨은 버클리에 대해 이렇게 결론 내린다.

버클리 주교는, 적어도, 숲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일에 영향을 받을(affected) 사람이 없다면 의미 없다(meaningless)고 단언한다는 점에서 옳았다.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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